[호남 근현대 시문학] 북방을 살다간, 디아스포라의 고고 게시기간 : 2026-06-10 07:00부터 2030-12-23 21:21까지 등록일 : 2026-06-08 11:27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호남 근현대 시문학
|
||||||||
|
1. 잊힌 시인을 호명하며 우리의 문학사는 작가적 명성과 문단의 헤게모니 중심으로 서술되었다. 이것들과 거리를 둔 작가들은 자연스럽게 문학사에서 소외되었다. 당대의 시대적 상황이나 역사적 배경과 밀접한 연관이 없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문학사를 서술하는 자들의 게으름도 한몫한 것은 분명하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문학사에서 소외된 많은 작가를 어떻게 문학사 안으로 불러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려 하는 시인도 역시 문학사에 기록되지 않은 시인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시인, 하지만 1930년대 동인지 시대의 한 축에 있었던 시인이다. 이 글에서는 시인 오화룡의 문학적 업적과 작품이 제대로 평가될 수 있는 장을 제공하려 한다. 차츰 詩作경험에서 詩的 視野가 넓어지니까 詩의 質的提高에 힘을 모음으로 月 二, 三篇의 작품은 더 넘지 못했다. 더욱 그 당시 나의 작품에 부채질하여 주던 이가 家兄의 동창 巴人 金東煥兄이다. 그때 巴人은 우리나라 처음인 敍事詩 “國境의 밤”이 출판되었던 때라 문학청년들의 존경을 한몸에 지니었든 巴人이었으므로 나는 나의 작품을 여러번 보여준 기억이 새삼스럽다.
중학을 졸업하고 한때는 巴人이 주간하는 『三千里社』에 문학공부를 하기 위하여 入社할 계획도 있었으나 家兄은 자기 친구라는 입장에서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좌절하여 버렸다. 시인 김동환선생은 같은 고향의 태생으로 후배들에게 끼친 영향은 크다 아니할 수 없다.1) 글쓴이 오화룡에 대해 아는 이는 거의 없을 것임으로 먼저 문학적 생애를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 오화룡(吳化龍, 1915.3.30∼1972.9.10)은 1915년 3월 30일 함경북도 경성군 경성면 수성동 47번지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1936년 3월 2일 사립 동흥중학교를 졸업했다. ‘시작경험에서 시적 시야가 넓어지니까 시의 질적 제고에 힘’을 모아 좋은 시를 쓰기 위해 노력했던 그는 “보통학교 3학년 때부터 동요를 지었고 자작 동요 낭독의 밤에 2, 3차 발표한 뒤로부터는 동요 짓기가 일념지사가 되어 하루 보통 3, 4편은 습작”했다. 그리고 “5학년 되든 해는 『아이생활』지에 수록된 동기”가 되어 “중학에 들어가서는 모르는 사이에 오늘 같은 자유시에 넘어섰는데 시의 선배들은 그것이 시의 정상한 발전 과정이라고 격려”를 받았고 중학 3학년 때에는 당시 『신동아』라는 월간지의 학생문예란에 선재”2)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런 차에 최초의 서사시집 『국경의밤』으로 문단의 시선이 집중되었던 고향 선배이자 형의 친구였던 김동환을 자주 찾아가 시 쓰기 등에 대한 조언을 받았다. 급기야 ‘문학공부’를 더 하기 위해서 김동환이 발행한 ‘『삼천리사』에 입사할 계획’까지 세울 정도가 되었다. 시인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그가 본격적으로 문단에 등장한 것은 시동인지 『시인부락』이었다. 동인지 『시인부락』은 1936년 11월 서정주가 편집 겸 발행인으로 창간했다. 김동리, 함형수, 김광균, 김달진, 오장환, 여상현 등은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 출신들이다. 오화룡도 1937년 4월 7일에 입학, 1940년 3월 16일에 중앙불전을 졸업했다. 시인 오장환이 편집 겸 발행을 맡은 2집에 「달밤」, 「娼窟」 2편을 발표해서 시인으로 첫 발을 딛은 그는 『시인부락』 시절을 상세하게 적었다. 희미한 記憶을 더듬어 보면 내가 「시인부락」의 共同廣場에 나타나기는 1935년이 되던 해가 처음인 것 같다. 그때 徐廷柱형과 作故詩人 咸亨洙 이외 몇 사람의 發起者가 있었다고 보는 데 이 책의 主幹者 徐廷柱형을 직접적으로 많이 협조해준 사람은 아무래도 作故詩人 咸亨洙임에 틀림없다. 亨洙는 徐廷柱와 人間的으로 친절한 사이며 文學呼吸도 서로 소통되는 처지면서 동시에 그들의 友情이 高譟된 시기는 咸亨洙가 東亞日報 新春文藝에 詩 「사슴」이 當選된 이후라고 짐작한다. 내가 「詩人部落」동인이 된 동기는 咸亨洙와 同窓이자 同鄕이요, 그위에 詩文學이라는 同道를 같이 걸어 성장한 所以然으로 그 때 亨洙의 소개로서 졸작 「月夜」와 「娼屈」을 「詩人部落」에 실렸던 것이다. 同人誌를 꾸려가는데 직접 險路를 겪은 사람은 물론 徐廷柱형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精神的 支援者는 역시 作故詩人 咸亨洙를 잊을 수 없겠다.
처음 集合場所는 알 수 없지만 다음번은 서울 社稷洞과 孝子洞 分岐點에서 앞골목 (기억할 수 없음) 亨洙가 起居하는 下宿房이다.3) 오화룡과 시인 함형수는 고향 친구이자 중앙불전 동창이다. 함형수가 시동인지 『시인부락』 동참을 제안해서 참여했고 둘은 그렇게 시인의 길을 걸었다. 『시인부락』 중심에 서정주가 있었다. 그에 못지않게 함형수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함형수 하숙방은 서울특별시 사직동과 효자동 분기점 앞 골목 어귀쯤에 있었다. 그곳은 시인부락 동인들이 거점이자 문학 담론의 장이었다. 시 담론이 치열해서 도가 넘어가면 마음이 상할 지경에 이르기도 했지만 ‘시의 성장에 시금석이 피는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시인들은 성장했고 문학적 성과로 존재를 증명했다.
오화룡은 『시인부락』 뿐만 아니라 1937년 4월 22일 창간, 1940년 3월 통권 4호로 종간된 중앙불전 학생회지 『룸비니』에도 참여했다. 서정주, 함형수 등 중앙불전 출신이 주축이었다. 이어서 순문예 동인지 『백지』 동인으로도 참여했다. 『백지』는 1939년 7월 최익연이 편집 겸 발행인으로, 조동탁을 주간으로 창간한 『백지』는 1939년 10월 28일 통권 3호로 종간됐다. “동인들은 비록 교복을 입은 학도들이었으나 그의 패기나 작품 수준이 기성을 육박하는 감도 없지 않았으나 마치 종합 문예물 같은 인상을 담은 동인지”였고, “학도들의 일제의 식민지적 고립감을 극복하려는 일련의 저항정신의 변용”이었기 때문에 “나의 졸고 가운데서 시 「아왕국」은 끝내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하였”4)다. 그는 이렇게 1930년대 동인지 시대 한복판에서 문학사를 채우면서 한편으로 <매일신보>, 『인문평론』 등을 통해서 문학적 입지를 강화했다. 이용악은 “가끔 작품을 발표는 하나 제가 무명하듯이 그다지 알려지지 못한, 이제 큰소리를 치고 나설 동무로선 우리 경성만 해두 김진세, 신동철, 허이복, 오화룡, 함형수, 함윤수, 이수형”5)라고 거명했고, 이용악도 1년간 읽은 작품 중 좋다고 생각하는 작품으로 “황순원 「별」(소설), 석인해 「해수」(소설), 최정희 「백야기」(소설), 오화룡 「길」(시)”을 뽑았6)다. 그는 시인으로 자리를 굳건하게 다져나갔다. 그러나 그는 “일제는 대동아 전쟁이 벌어지자 일어로 된 전쟁시를 쓰라고 강요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민족양심의 마지막 유산으로 나는 인문평론지에 “길”이라는 1편을 남겨놓”7)고 절필했다. 일제에 부역하지 않고 문학 정신과 민족정신을 지키는 고고함을 유지했다. 2. 동인지 『민림』, 남행길에 오르다 시인은 1940년 4월 5일부터 사립 청진실천여학교에서 해방을 맞았고, 북청농업학교를 거쳐 북청여자사범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1930년 동인지 시대의 주역이었던 그가 해방 직후 1945년 11월 동인지 『민림』을 오화룡이 직접 주간했다. 해방 직후 북한 땅에서 최초로 지방에서 간행한 것이 순수시문학 동인지 『민림』이었다. 그러나 북한에서 순수시 문학의 길이 순탄할 리 없었다. 이듬해인 1946년 3월 『민림』은 반동 문학으로 규정되었다. 그리고 독자로부터 강제로 회수하는 등 별별 공갈을 다 받았다. 군중집회가 있을 때마다 큰 사건이나 되는 것처럼 반동 문학자로 몰아세우는 바람에 그들의 악질적인 사회적 매장을 여지없이 당했다. 생사 문제가 좌우되는 무서운 풍상을 겪으면서 『민림』을 주간할 수 없게 된 그는 사선을 넘어 남행을 결심했다. 문학에 대한 열망과 표현의 자유를 향해 결행한 남행길을 선택한 것이다. 무서운 풍상을 피해서 끝내 고향을 등지고 고고한 정신으로 휴전선을 넘어 광주에서 정착한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시를 내려놓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화룡은 남행을 감행한 후 광주에서 1951년 동인지 『문학자』와 1964년 동인지 『시예술』에도 참여했다. 함경도 경성의 시인은 표현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찾아 “전남광주에 까지 전전하여 이 지방 시인들과 동인 운동을 같이할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8)다. 그러나 한 치 앞도 모르고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자유를 찾아온 삶이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감추고 있었을 고통을 숨죽여가며 오로지 쓸 뿐이었다. 시인의 자세를 중요시하며 고고한 순결성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 시인 오화룡의 품격이었다. 詩心마저
上品이 되어 詩人없는 이날 어둡습니다. 아아 公明을 사랑하는 마지막 한 사람 꼭 보고 싶습니다. 사는 이보다 죽음이 옳다고 생각하는 마지막 義人을 꼭 보고 싶습니다. 오화룡, 「웃음으로 끝날 것인가」부분9) 이 시에서 드러나 있는 것처럼 그는 ‘詩心마저/上品이 되어/詩人없는/이날 어둡습니다’고 지적하면서, 그는 ‘公明을 사랑하는/마지막/한 사람’이고자 했으며, ‘사는 이보다/죽음이 옳다고/생각하는/마지막/義人’이고자 했다. 그가 표현의 자유를 선택하여, 사선을 넘은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詩人이 詩를 쓴다고 하는 일은 詩가 詩人의 呼吸이 되기 때문이다. 詩人이 自己生命을 維持하자고 보니 자연 詩를 써야할 不可避한 理由가 있다. 이것을 解明하려고 하면 먼저 우리는 詩를 만드는 詩의 피를 理解해야 한다. 그러니까 當然히 體驗을 記錄만 하면 詩가 되는 것이라고 速斷할 수 없는 理由가 이 点에 있는 것이다. 물론 記錄를 빼놓고는 詩란 생각조차 할 수 없지만 아무리 偉大한 詩人이라도 그가 勞作한 한 篇의 作品은 作品이 되기에 앞서 詩的 意義를 가진 體驗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는 事實하나가 存在할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詩人이 그의 生活 가운데서 수性的인 生活面도 體驗은 體驗이지만 何等의 詩的 이메지에 도움을 주지 않는 平凡 가운데서도 가장 平凡한 體驗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體驗 가운데서도 特別한 構造로써 성립된 體驗이 바로 作品이 된 것을 詩라고 하겠다.10)
그가 시를 쓰는 이유는 분명했다. 시인이 시를 쓴다고 하는 일은 시가 시인의 호흡이 되기 때문이다. 시인이 자기 생명을 유지하자고 보니 자연히 시를 써야 할 불가피한 이유가 되었다. 그에 따라 어떤 위대한 시인이라도 한 편의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시적 의의가 있는 체험을 바탕으로 해야 하고 그래야만 작품다운 작품이 된다고 봤다. 그에게 시는 목숨을 걸고 지킨 것이었다. 시론을 통해서 한 시인을 영웅으로 억지로 올려놓고 다시 타락시켜 버리는 죄악으로 작품을 파는 것을 경멸했다. 시는 인간이 시도의 묘미를 터득하는 시적 의의를 가진 체험이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전남일보에 수 편의 시와 평론을 썼다.
3. 광주에서 시의 종언을 고하다 광주에서 활동한 시인으로 시 정신을 올곧게 지켜왔다. 한편으로 그의 마음속에는 부모 형제가 있는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 말할 수 없어 커졌다. 고향을 그리워만 할 뿐 토해내지 못한 언어는 안에서 삭아버린 1972년 7월 어느 날, 아침뉴스에서 남북공동성명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기쁨으로 닫힌 말문을 열어보려 했으나 안에서 삭은 언어는 끝내 말이 되지 못하고 말았다. 쓰러져 병상에 누운 시인 오화룡은 마지막까지 고고한 시적 체험을 놓지 않고 분단의 디아스포라를 살았던 시인은 「病中有感」을 끝으로 시적 종언을 고하고 말았다. 밖에 바람은 멈춰도
몸살이 바람을 청한다. 네 더운 손으로 남아지 紅玉을 깎아 주려나. 벗기우는 사과 껍질이 모두 칭칭 몸에 감기듯 찬데. 生老病死, 이중에 어느 한 가지라도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저 韓國식 창살문은 여는 척 해도 춥다. 「病中有感」전문, 1972.8.11 이 시를 통해 ‘사과껍질이/모두 칭칭 몸에 감기듯 차’다와 ‘생노병사’를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언술에서, 그리고 ‘차다’는 촉감은 몸의 체온이 내려가고 있음을 죽음을 예감하고 있음을 목도할 수 있다. 그는 해방이 되자 1930년대 동인지 시대의 주역으로 발표했던 4, 50편의 시를 모아 시집을 출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검열을 피하려고 추상적이고 위축되고 기형적인 작품들뿐이라는 판단으로 시집을 내지 않았다. 해방 후에 발표한 작품들은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원고를 분실해서 시집을 낼 수 없었다. 그 뒤로도 시집을 내려고 하였으나 일사천리인 연기같이 사라지는 가벼운 시집을 내서 뭣하겠냐는 는 회의에 빠졌다. 일생에 단 한 편의 시일지라도 오래 생명을 지속할 수 있는 그런 시를 쓸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여겼다. 엄격한 겸손의 시인은 “고독한 곳에서 닦이어 대중의 것”이 되는 시, 그리고 “다시 시는 찬란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11)이 시이어야 한다고 믿었는데 시집 한 권을 내지 못한/내지 않은 대신 유고집 『오화룡시집』으로 남았다. 필자가 확인한 오화룡은 작품은 시 105편, 수필 10편이다. 적지 않은 작품이다. 이상은 대강 얼개로 시인 오화룡의 자리를 찾아본 것이다. 이 글로 월남 문학인으로 쓸쓸했던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아진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4. 북방의 정서와 호흡으로 남다
초기의 작품이다. ‘능구렝이처럼 느러진 倦怠’, ‘阿片같이 朦朧한 意慾’이 드러내는 의욕이 상실된, 그러나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여인과 공간의 분위기에서 퇴폐와 의미를 상실한 채 살아가는 여인의 처참이 메마르다. 창굴은 단순한 창굴이 아닌 여인 병들게 하는 공간이자 무미건조의 목숨이 살고 있는 공간이다. 몸을 팔아야 살 수 있는 삶인지, 몸을 파는 것이 목적인지, 알 수 없는 무의미의 몸짓은 육신의 눈과 피와 살을 지닌 하품에서 절정에 닿는다. 무료와 무의미를 달래는 이 쓸쓸함은 이미지로 남고 감정은 무미건조하기 이를 데 없다. “북국적인 황막한 정조가 깃들어져 차고 깊은 북국적인 호흡이 작품”12) 위에 흐르고 찬 바람이 스친다. 1) 오화룡, 「나의 詩歷」, 『학생문예』창간호, 1959.10.15.
2) 오화룡, 위의 글 3) 오화룡, 「日帝에 대한 抵抗精神의 變容」, 『현대문학』, 1966.8. 4) 오화룡, 위의 글 5) 「關北, 滿洲 出身 作家의 『鄕土文化』를 말하는 座談會」, 『삼천리』제12권 제8호, 1941. 8. 6) 이용악, 「今年 一年間의 我文壇의 收獲」, 『삼천리』13권 12호, 1941.12. 7) 오화룡, 「나의 詩作生活 -詩의 世界는 孤高한 것」, 전남일보, 1958.7.20. 8) 오화룡, 「日帝에 대한 抵抗精神의 變容」, 『현대문학』, 1966.8. 9) 오화룡, 「웃음으로 끝날 것인가」, 전남일보, 1965. 6. 9. 10) 오화룡, 「詩的 意義를 가진 體驗」, 전남일보, 1962. 8. 18. 11) 오화룡, 「나의 詩作生活 -詩의 世界는 孤高한 것」, 전남일보, 1958.7.20. 12) 오화룡, 「나의 詩歷」, 『학생문예』창간호, 1959.10.15 참고문헌 오화룡, 「나의 詩作生活 -詩의 世界는 孤高한 것」, 전남일보, 1958.7.20.
오화룡, 「나의 詩歷」, 『학생문예』창간호, 1959.10.15. 오화룡, 「웃음으로 끝날 것인가」, 전남일보, 1965.6.9 오화룡, 「日帝에 대한 抵抗精神의 變容」, 『현대문학』, 1966.8. 오화룡, 「詩的 意義를 가진 體驗」, 전남일보, 1962.8.18. 오화룡, 『오화룡시집』, 국제출판사, 1972. 이용악, 「今年 一年間의 我文壇의 收獲」, 『삼천리』13권 12호, 1941.12. 「關北, 滿洲 出身 作家의 『鄕土文化』를 말하는 座談會」, 『삼천리』제12권 제8호, 1941.8. 글쓴이 이동순 조선대학교 교수 |
||||||||
Copyright(c)201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All Rights reserved. |
||||||||
| · 우리 원 홈페이지에 ' 회원가입 ' 및 ' 메일링 서비스 신청하기 ' 메뉴를 통하여 신청한 분은 모두 호남학산책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호남학산책을 개인 블로그 등에 전재할 경우 반드시 ' 출처 '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
||||||||
로그인
회원가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