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의 성좌] 90년만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나주역사건’의 박기옥(朴己玉, 1913~1947) 게시기간 : 2026-01-21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6-01-19 15:5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항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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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알려졌지만 막상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인물 ‘박기옥’ ‘박기옥’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촉발시킨 10월 30일 ‘나주역사건’의 당사자이며, 그래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말할 때면 으레 서두에 나오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그에 대한 자료는 찾기 어렵다. 이 분야를 공부하는 필자도 나름 애써 봤지만 변변한 자료를 건지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그가 ‘나주역사건’ 때 일본인 남학생들에게 희롱을 당한 피해자이며,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전개되면서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는 정도만 알고 있다. 널리 알려졌는데도 우리는 정작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필자도 사촌동생이자 함께 ‘나주역사건’의 당사자였던 박준채가 “박기옥은 사건 후 투옥, 3개월 만에 출감했다. 그 후 그녀는 목포의 서익철에게 시집가 1946년 두 딸을 남기고 별세했다”고 회고한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러던 중 최근 필자는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의 지원을 받아 작업을 수행하면서 역시 기념관으로부터 정보를 제공받아 그의 후손(외손자)을 만나 단편적이지만 몰랐던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진학과 ‘나주역사건’, 그리고 퇴학 박기옥은 1913년 10월 25일 전라남도 나주군 나주면 금정에서 인쇄업을 하는 박관업의 1남 3녀 중 장녀로 출생했다. 부친은 나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2월 박공근·이항발·박복영 등과 함께 사상단체인 효종단을 결성하고 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25년 7월 나주청년회 정기총회에서 임원에 선출되는 등 청년운동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일제는 1933년 6월 제일인쇄소를 압수수색했는데, 그가 운영하던 인쇄소일 수도 있다. 이같은 부친의 영향을 받아 박기옥도 평소 배일사상을 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자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열차로 통학하던 그는 1929년 10월 30일 이른바 ‘나주역사건’의 당사자가 되었고, 이는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함께 열차로 광주고등보통학교(현 광주제일고등학교)에 통학하던 사촌동생 박준채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10월 30일 오후 5시 30분께 통학열차가 나주에 도착했을 때다. 나는 하루의 피곤함을 느끼면서 출찰구 쪽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앞에서 일본인 학생들의 깔깔대는 소리가 들려 무심코 쳐다보니 기옥이 누나의 친구인 암성금자, 이광춘 등이 희롱을 당하고 있었다. 피가 역류하는 듯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광주중학교 4학년인 후꾸다(福田), 스에요시(末吉), 다나까(田中) 등의 희희닥거리며 이들의 댕기머리를 만지고 잡아당기고 있었던 것이다. 기옥이 누나의 쩔쩔매는 모습도 보였다. … 나는 쏜살같이 뛰어갔다. 출찰구를 빠져나오면서도 기옥이 누나의 댕기머리를 잡고 장난을 치던 후꾸다 앞을 가로 막았다. “후꾸다! 너는 명색이 중학생인 녀석이 야비하게 여학생을 희롱해?” 나는 나보다 위인 후꾸다를 노려봤다. 후꾸다도 물러서지 않았다. “뭐라구? 센진(鮮人)도 구세니 …”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후꾸다의 면상을 갈겼다(박준채, 「독립시위로 번진 한일학생 충돌」, 『신동아』 1969년 9월호).
1929년 10월 30일 일어난 ‘나주역사건’은 너무도 유명하다. 요지인즉 나주역 역사(驛舍)에서 광주중학교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이광춘·암성금자(岩城錦子) 등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자 이에 격분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이자 박기옥의 사촌동생인 박준채 등이 이를 항의하는 과정에서 시비가 붙어 난투극으로 번졌다는 것이다. 역사학계에는 이미 널리 알려진 바이지만, ‘댕기머리’는 해방 이전 어떤 자료에도 나오지 않으며, 대신 ‘희롱’ 또는 ‘농락’이란 표현으로 나온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 1956년 양동주의 『항일학생사』에 처음으로 언급되었고, 『동아일보』 1960년 11월 3일자에 실린 최은희의 「광주학생사건 여학도 투쟁기」에서 재론되며, 『신동아』 1969년 6월호에 실린 박준채의 「독립시위로 번진 한일학생 충돌」에서 다시 거론된 이후 ‘댕기머리 희롱’은 정설처럼 굳어졌다. ‘나주역사건’에 대해 당시 자료에는 ‘댕기머리’ 부분이 나오지 않지만 광주중학교 일본인 학생들이 어떤 형태로든 조선인 여학생들을 ‘희롱’한 것으로 짐작되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박기옥은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결국 그는 이듬해인 1930년 2월 학교측으로부터 퇴학처분을 받았다. 다음은 관련 기사이다. 작년 10월 30일 오후에 나주역에서 광주중학생 복전(福田)의 농락을 당한 것이 동기가 되어 수백 학교의 동요와 다수한 검속자를 낸 조선학생사건의 장본인 박기옥(18) 양은 사건 발생 당시부터 책보를 던지고 2월 15일에 광주여자고보에서 근신을 명함으로 공부도 좋거니와 문제 야기의 책임상 마음에 가책을 억제치 못하여 단연히 퇴학을 하였다 하며 박양의 종제되는 박준채와 그의 지우인 이광춘(17) 양도 일시에 퇴학하였다더라(『조선일보』 1930.02.26. 「학생사건의 장본인 박기옥 양의 퇴학」).
여기를 보면 마치 박기옥이 스스로 ‘자퇴’한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는 강제퇴학이었다. 그는 사건 직후 경찰에 체포되어 3개월간 투옥되어 조사를 받고 결국 불기소 처분을 받아 석방되었다. 그리고 석방되자마자 학교측으로부터 퇴학을 종용받은 것이다. 이때 역시 ‘나주역사건’의 당사자인 박준채와 이광춘도 퇴학처분을 받았다. 서익철과의 결혼 생활과 사망 이후 박기옥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박기옥의 외손자(박훈)에 따르면, 퇴학 후 부모는 그에게 금족령(禁足令)을 내려 3개월 동안 외부 출입을 금지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일제로부터 ‘요시찰인물’로 낙인찍혀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가 언제까지 그를 집안에만 머물게 할 수는 없었고, 평소 당찬 성격의 그는 다시 어떤 활동에 나섰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암태도소작쟁의의 지도자 서태석(독립유공자, 2023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의 장남 서익철과 1938년 목포에서 결혼했다. 시부와 남편이 각각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인물이었으므로 박기옥도 그같은 운동에 참여했다가 인연이 닿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연애결혼’인 셈이다. 결혼 이전 서익철은 1927년 8월 목포청년회관에서 열린 호남소년소녀웅변대회에서 암태도 대표로 입상했고, 1933년 6월 목포청년동맹 보선위원에 선출되었다. 이어 1934년 4월 양재용·박흥복 등과 함께 목포경찰서 고등계에 검거되었는데, 혐의는 선박 하역 노동자[船荷勞動者]들을 상대로 사회주의를 선전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언론에는 ‘목포선하노동자 적화계획(木浦船荷勞動者 赤化計劃)’이라 보도되었고, 이들은 검찰에 송치될 예정이었다. 1938년 결혼 이후 이들 부부의 행적도 파악이 쉽지 않다. 외손자의 증언에 따르면 해방 이후 성균관대학교 교수가 된 남편을 따라 서울로 올라와 대학교 인근에서 살았다고 하며, 어느 날 집을 떠난 남편을 찾아 두 딸을 데리고 서울 혜화동에서 셋방을 얻어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서익철은 1945년 12월 “일제정신(日帝精神)을 발본(拔本)하여 신사회 이념을 배양시키기 위해 소국민교육도서(小國民敎育圖書)를 출판하기” 위해 현삼해·장세기 등과 함께 서울 명륜동에서 신문화보급회 결성했다. 박기옥은 서익철과의 사이에 딸 서정이(1942년생)와 서정현(1945년생)을 두었는데, 치료를 받던 중 ‘주사쇼크’로 1947년 6월 2일 병원에서 사망했다. 유해는 미아리에 안장되었으나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이후 두 딸은 조모와 함께 서울에서 살았으나,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했던 부친 서익철은 반공주의자들의 탄압을 피해 어디론가 은신했으며, 1948년 어느날 반공청년단이 들이닥쳐 집안이 풍비박산났다고 한다. 결국 서익철은 6.25전쟁을 전후해서 월북했다고 한다. 사실상 고아가 된 두 딸은 나주의 외가로 내려왔고, 장녀 서정이는 거의 고학을 하다시피 하며 모친의 모교인 전남여자고등학교를 어렵게 졸업했다. 이후 결혼하여 아들을 낳고 살다가 1974년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얼마 지나 동생 서정현도 언니를 따라 도미했다. 뒤늦은 독립유공자 서훈 이후 후손들은 박기옥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면서 국가보훈처에 2차례 신청했지만 불발되었고, 학적부와 판결문을 찾아내서 3번째 신청하여 마침내 박기옥은 2019년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대통령표창)로 서훈을 받았다. 다음은 그의 공적조서 내용이다. 1929년 전라남도 광주군의 한·일 중등학교에는 인근 나주·영산포 등지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당시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기옥도 나주에서 광주로 통학하고 있었다. 10월 30일 하교 시 나주역의 개찰구와 대합실에서 광주중학교 일본인 학생들이 그를 밀치고 나갔다. 그의 사촌 동생이자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이었던 박준채와 광주중학교 일인 학생 후쿠다(福田) 간에 격투가 벌어졌다. 이는 11월 3일 광주지역 한일 학생들간의 집단격투로 이어졌다. 한국 학생 70여 명의 학생들이 부당하게 체포되었다. 이를 계기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11월 14일 아침부터 교정에서 구속학생의 석방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16일부터는 수업 거부를 단행했다. 박기옥은 이날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1930년 1월 8일 개학하자 학생들은 동맹휴학과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동맹을 단행했다. 박기옥도 여기에 참여했다. 3월(주: ‘2월’의 오기) 23일 퇴학처분을 받았다.
연구자 입장에서 보면 확인이 필요한 대목도 몇 군데 보이지만 여기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장녀 서정이가 귀국하여 8월 15일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경축식에서 대통령으로부터 모친의 표창장을 대신 받았다. ‘나주역사건’ 발생 90년만에 박기옥은 명예를 회복하고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으로 당당히 인정받게 된 것이다. 남겨진 과제 단순히 ‘나주역사건’과 관련해서만 알려졌던 박기옥의 행적은 퇴학 이후 거의 감춰져 있다. 그런데 서익철과 만나서 결혼하는 과정을 보면 그 역시 남편처럼 농민운동이나 사회운동에 투신했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즉 ‘나주역사건’ 당시 단지 수동적인 피해자로면 비쳐졌던 그가 민족문제와 사회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능동적으로 활동했을 개연성이 배어나는 것이다. 물론 구체적인 근거 자료가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이 분야 연구자로서 관심을 갖고 풀어야 할 과제 하나를 받게 된 느낌이다. 글쓴이 한규무 광주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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