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공모전 수상작] 동학토벌군 기념물로 본 역사 정의 게시기간 : 2025-07-23 1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5-07-16 17:39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원고 공모전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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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강렬한 역사적 사건은 정체성을 담은 명칭으로 후대에 기억된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1948년 여순사건, 1907~9년 한말 의병,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그 사건의 명칭 자체가 역사적 평가를 함축하고 있다. 이런 역사적 사건들은 명명(命名)을 기반으로 정체성을 담은 다양한 기념조형물을 구현하며, 기념물에 대한 관리, 접근성, 교육적 활용도는 사건의 현재성을 여실하게 보여 준다. 1. 동학란과 전남지역 기념물 1894년 동학농민군의 무장 항쟁은 당대에 [동학란](東學亂)이었다, 동학 교도들은 [동비](東匪)로 불렸다. 해방 후에도 여전했다. 1949년 중등사회과 ‘우리나라의 역사’ 편에 [동학란]으로 처음 기술됐다. 1970년 인문계고 역사 교과서에 이르러서야 [동학혁명]으로 수정되었다. 동학 항쟁은 1970년대 동학혁명운동, 동학농민혁명운동으로, 1990년대에는 동학농민운동으로 교과서에 서술된다. 2004년 3월5일 제정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는 [동학농민혁명]으로 규정돼 있지만, 아직도 혁명과 운동 사이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동학 항쟁이 당대뿐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도 [난](亂)으로 갇히면서 전남지역에는 토벌군을 추앙하고 위무하는 다양한 기념조형물이 세워졌다. 동학 진압군 주요 기념물은 ▲장성 활룡전적 이학승 순의비 ▲나주 금성토평비 ▲강진 민보군 김한섭 비 ▲장흥 갑오동란 장졸 순절비 ▲장흥 수성군 영회당 ▲장흥 이용태 흥학애사비 등이다. 동학 토벌대 기념조형물은 누가, 언제, 어떤 의미를 담아 조성했을까. 그 기념물들은 현재도 여전히 승자의 상징으로 추앙받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2. 장흥 황룡전투와 이학승 순의비 1894년 1월 10일(음력) 전봉준이 이끈 1천여 명의 동학농민군은 고부 관아(정읍시 고부면)를 점령한 뒤 3월 20일 무장읍성(고창군 무장면)에서 전면 봉기했다. 동학군은 3월 26~29일 백산(부안군 백산면)에서 호남창의대장소를 설치하고, 총대장에 전봉준, 총관령으로 손화중, 김개남을 추대했다. 동학군은 4월 7일 황토현 전라감영군을 격파하고 정읍 관아를 점령했다. 전봉준은 호남 행정수도인 전주로 직행하지 않고, 역으로 전남 서남부를 공략하는 우회전술을 구사했다. 4월 8일~16일 흥덕, 무장, 영광, 함평을 접수했고, 이어 장성을 거쳐 전주로 올라가려는 계획이었다. 조정은 동학 세력이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자 장위영의 영관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 본격적인 진압 작전에 나섰다. 초토사 홍계훈은 대관 이학승에게 기마병 등 300명을 내주며 동학군의 정찰과 선봉대 임무를 부여했다. 4월 23일 이학승은 장성 황룡강변에서 동학군을 기습 공격했다. 농민군은 당황했으나 전열을 정비한 후 비장의 무기인 장태를 앞세워 관군을 공략했다. 장태는 원래 닭 둥지이나, 대나무로 크게 만들어 안에 짚을 넣었다. 동학군은 장태를 엄폐물로 삼아 관군 진영으로 돌진해 대관 이학승과 경군 5명을 사살하며 크게 승리했다. 이학승은 1852년생으로 1874년 무과에 합격하여 도판경첨, 장위영 초관 겸 선전관을 지냈다. 전사 당시 43세. 1897년, 장성 황룡전투 후 3년이 흘렀다. 장성지역 유림을 중심으로 황룡에서 숨진 이학승 추도비 건립 논의가 일었다. 노사 기정진이 앞장섰고, 장성 유력 씨족들이 기금을 모았다. 비문은 유림 거두 면암 최익현이 작성했다.
![]() 그림 1 황룡전적 이학승 순의비 비석은 높이 160㎝, 두께 23㎝, 폭 65㎝에 21행 43자를 음각으로 새겼다. 위치는 당초 전사지에서 50여 걸음 떨어졌지만, 장성에서 영광으로 가는 큰길 옆에 세우기로 정했다. 비석 앞면에 ‘贈左承旨李公學承殉義碑’(증좌승지이공학승순의비)라 썼다. 이학승은 또 3년이 지난 1900년 9월, 서울 장충단에 모셔졌다. 장충단은 고종이 명성황후 시해 사건 때 순사한 장졸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조성한 추모공간이었다. 동학 때 양호초토사로 활동했고, 을미사변 때 일본군을 막다 전사한 시위대 대장 홍계훈이 주신으로 제향됐다. 대관 이학승도 배향되었다. 이학승은 전사 후 무관에도 불구하고 좌승지로 추증됐고, 전사지에는 순의비가, 그의 위패는 국가 공식 추모공간인 장충단에 배향됐으니, 당대에는 틀림없는 승리자였다. 이학승 순의비가 건립된 지 128년이 지난 오늘 순의비는 과수원 밭에 초라하게 서 있다. 비석은 퇴색해 글자를 읽을 수 없고, 주변은 폐비닐과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다. 찾는 이도, 그를 추모하는 발걸음도 없다. 적어도 100여 년 동안 장성 황룡 땅을 지배했던 승리자의 표징은 더 이상 아닌 듯싶다.
반면에 순의비 우측 건너편에는 [동학농민군 승전 기념탑]이 우뚝 서 있다. 동학농민군을 상징하는 죽창 모양으로 조각가 나상옥 작품이다. 탑신 높이 30m, 대나무 모양 지름 2.5m이며, 탑 전면에는 3×8m 크기의 황룡전투 부조물이 부착돼 있다. 탑 좌우면에는 동학농민군 4대 강령과 곽재구 시인의 ‘조선의 눈동자’ 작품도 새겨 넣었다. 1994년 동학농민혁명100주년을 맞아 광주전남기념사업회가 조성했다. 동학군이 관군을 물리친 황룡 현장은 동학 4대 전적으로 자리매김됐다. 더이상 관군의 추모와 위세 공간이 아니다. 30m로 우뚝 선 동학탑과 1.6m의 과수원 밭 순의비가 극한 대조를 보인다. 진정, 역사의 승리자는 누구일까. 3. 나주 목사 민종렬의 수성記 ‘금성토평비’ 동학농민군은 유독 전라도에서 나주와 운봉(남원시로 편입)을 점령하지 못했다. 나주가 전라도 육군의 5영 가운데 우영 사령부인데다, 나주 목사가 관노 등을 수성군으로 차출할 수 있어 타 지역과 무장력이 남달랐다. 여기에 유림과 아전 등 지원 토호세력도 굳건했다. 나주, 광주 등 전남 서남부 동학 농민군 3천여 명은 7월 5일 나주 서성문 공격에 나섰다. 동학군이 몰려오면 달아났던 지방관과 달리 나무목사 민종렬은 결사 항전했다. 수성군의 우세한 무기와 잘 훈련된 병력, 지휘관의 리더십에 동학군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나고 만다. 이후에도 동학군은 수차례 나주 공략에 나서지만 연전 연패했다. 동학군은 2차 봉기 후 10월 20일 손화중과 오권선 연합부대 1만 3천 명으로 다시 나주성을 공격했다. 선봉대가 광주 외곽의 침산에서 수성군과 일전을 치렀지만, 또다시 패퇴했다. 나주 유림들은 동비를 막은 수성군의 공적을 찬양했다. 금성관 입구에 서 있는 [금성토평비] (錦城討平碑)가 그 기념물이다. 나주 옛 이름인 금성지역의 동학군을 토벌해 평화를 지켜주었다는 의미다.
![]() 그림 3 나주 금성토평비 비문은 송사 기우만이 짓고 글씨는 송재회가 써서 1895년에 세웠다. 본래 나주목 동헌 정문인 정수루 앞에 있었으나, 1930년 금성관 앞으로 옮겼다. 그러다 1976년 나주 군청이 있던 금성관 내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비문 내용을 풀어보면 이렇다. “처음으로 적과 무안에서 싸워 여춘이 머리를 바치고, 두 번째 싸움으로 나주 서문에서는 최경선이 밤중에 도망가고, 세 번째는 사창에서 이겨 그 근거지를 불태우고 네 번째 싸움으로 용진산에서 오권선이 몸만 겨우 빼내었고, 다섯 번째 고막 싸움에서는 패해 죽은 사람들이 들판에 가득하였고, 여섯 번째 나주 남산 싸움에서는 기세만 보고도 스스로 무너졌다.” 금성토평비는 오늘도 금성관 입구에 그대로 서 있다. 나주지역 시민단체는 동학을 토벌한 공적비가 과연 나주시의 랜드마크인 금성관에 버젓이 서 있는 게 타당하냐고 주장한다. 실상 나주에는 동학을 기리는 기념비가 없다. 한일 양국의 시민들이 세운 동학 학살의 사죄비만 있을 뿐이다. 금성토평비를 보노라면 아직도 혁명과 운동 사이에서 헤매는 동학농민혁명의 현주소를 보는 듯하다. 진정한 민중 세상을 염원했던 동학군을 학살했던 기득권과 지배자의 칭송비가 여전하다니…. 4. 장흥성 공략과 갑오동란 장졸 순절비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외세 침탈이 노골화하자 동학지도부는 9월 10일 전북 삼례에서 2차 항쟁의 횃불을 드높인다. 하지만 동학 주력군은 11월 8일 공주 우금치에서 통한의 패배에 이어 원평 구미란 전투, 태인 전투마저 승리하지 못한다. 설상가상으로 전봉준, 김계남, 손화중 등 핵심지도부가 12월 초에 체포돼 사실상 주력군은 소멸 상태에 빠진다. 동학 주력군이 해산하자 광주, 나주, 남평, 보성, 능주, 화순 농민군도 12월 초 장흥으로 모여들었다. 자그마치 1만에서 3만 명에 육박했다. 이들 전남서남부 동학세력은 북상하지 않고 나주 수성군과 대결하면서 한편으로는 나주 수성군을 붙잡아 두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다 보니 전남 동학군은 건재했다. 장흥지역에는 이방언 등 5명의 대접주 가 지역민과 연대하며 리더십을 유지하고 있었다. 장흥 연합부대는 12월 4일 장흥 벽사역을 공격했다. 벽사역졸 800명은 지난 3월 고부 봉기가 일어날 때 장흥부사 이용태와 함께 출병했다. 역졸들은 고부 농민군들의 학정에 신음하는 목소리를 외면하고 도리어 이들을 학살하고 붙잡아 고문했다. 벽사역을 점령한 동학군은 인근의 역졸 민가를 모두 불태웠다. 지난 고부의 가혹 행위에 대한 응징이었다. 장흥 연합군은 5일 장흥도호부 장녕성을 공략했다. 장흥은 당시 전라도 4곳(남원, 장흥, 순천, 담양)에만 있던 도호부로 종3품 도호부사가 다스렸다. 박헌양 부사는 소수 병력으로 농민군 1만 명과 대적하려 했다. 박 부사와 장졸 96명은 끝까지 저항했다. 장흥 성을 점령한 동학군은 장흥부사 박헌양을 체포하여 문책했는데, 박 부사는 동학군을 꾸짖다가 결국 처형당했다. 서울서 내려온 양호순무영의 우선봉장 이두황은 이들의 순절을 기려 포상을 베풀고, 1898년 전라도 어사 이승욱은 장흥성 북문 밖에 순절단을 조성했다. 이어 1899년 기우만이 수성군 장졸을 기리는 비문을 짓고 순절단 옆에 ‘광서20년 갑오동학란 수성장졸 순절비’를 세웠다. 광서(光緖)’는 청나라 덕종 광서제의 연호로, 1894년을 뜻한다.
![]() 그림 4 갑오동학란수성장졸순절비가 일제 강점기인 1928년 순절비와 순절단을 장흥 남산공원 기슭으로 옮겼다. 그 기세등등 하던 순절비는 퇴락했다. 관리의 손길도, 학생들의 역사교육의 현장도 아니었다. 비각은 잠겨있었다. 누군가 붉은 페인트를 순절비에 뿌려 훼손한 사건 이후로 자물쇠가 채워졌다고 한다. 빗물이 들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양철지붕을 덧댔는데. 낡고 녹슬어 누추했다. 박헌양 부사와 장졸들이야 나라의 녹을 먹으니 반란의 비적, 동학농민군을 막을 수 밖에 없을 테지만, 역사는 이들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 듯 했다. 5. 동학 최후 항쟁 석대들과 영회당 강진 전라병영성을 점령했던 동학군은 12월 12일 장흥으로 귀환, 남문 밖과 모정 뒷산에 진을 쳤다. 경군, 일본군, 장흥 수성군, 민보군 등 진압연합군과 전남서남부 동학군 3만여 명이 장흥에서 맞붙었다. 동학 농민군은 개활지인 석대들로 나와 장흥도호부를 압박해 나갔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총탄이 동학군에게 쏟아졌다. 최신식 소총과 미국제 기관총에 동학군은 속수무책이었다. 동학군은 장흥 석대들에서 최후의 항쟁을 벌였지만, 끝내 패배하고 만다. 장흥서초등학교 건너편 골목길로 들어서 100m 정도 올라가면 영회당이 있다. 최근에 진입로를 확보해 도로에서도 훤히 보인다. 예전에는 집과 집 사이 겨우 사람 1명 정도 지날 수 있는 오르막 골목길이라 찾기도 가기도 쉽지 않았다. 여름이면 진입로부터 수풀이 무성했다. 영회당은 장녕성 전투에서 전사한 박헌양 부사와 장졸 등 96명을 기리는 사당이다. 장흥성 북문 밖에 있던 순절단과 순절비를 일제 강점기 때 이전하면서 장흥 시내를 내려다보이는 남산에 영회당을 건립했다고 한다. ‘영회당사집’ 기록을 보면, ‘순무사(巡撫使) 이도재가 장흥에 왔다가 이 일을 듣고, 그 사당의 이름을 영회당(永懷堂)이라고 이름하고 그 계에 부조도 하였다. 어사 이승욱(李承旭)도 그들을 위해 시(詩)를 지었다’라고 적혀 있다.
![]() 그림 5 장흥 남산 기슭의 영회당 따라서 이도재가 내린 영회당 현판은 1898년 조성된 순절단(사당)을 의미하며, 그 뒤 1928년 남산에 후손들이 사당을 건립할 때 이 현판을 다시 붙여 영회당이라 이름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도재는 1909년 사망했기에 1928년에 영회당 당호를 내릴 수 없다. 장졸 추모시설인 순절단의 이전도 사당 건립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재로 소실됐기 때문이었다. 남산 기슭 영회당 오른편 언덕에는 영회당 건립에 도움을 준 김택규 군수를 기리는 ‘불망비’와 벽사역 찰방 김일원의 불망비도 함께 서 있다. 한때 장흥 유림과 고관들이 고개를 숙이던 영회당도 순절비처럼 찾은 이가 드문 듯하다. 사람들이 다녀간 흔적이 안 보인다. 6. 당대의 영화, 역사의 정의는 그날 후 130여 년이 흘렀다. 그 사이 동학란에서 동학농민혁명으로 명명되고, 진압군 기념물 대신에 동학농민군의 역사조형물이 남도 땅에 하나 둘 들어섰다. 석대들 항쟁 후 98년만인 1992년 농민군의 함성이 서린 석대들에 ‘장흥 동학농민혁명기념탑’이 세워졌다. 2004년에는 동학 특별법이 제정됐고, 2015년에는 ‘장흥 동학혁명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순의비, 토평비, 순절비, 영회당은 녹슬고, 쇠락했다. 2019년에는 황토현 전승일인 5월11일을 국가 지정 ‘동학농민혁명기념일’로 제정, 선포했다.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봉건체제를 개혁하고, 일제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고자 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거대한 혁명이었음을 공인했다.
수풀 더미에 묻힌 순의비와 순절비와 푸른 하늘로 비상하는 동학기념탑은 오늘, 다시 역사 정의란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집필자 이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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