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의 성좌] 일본헌병의 칼에 한쪽 팔을 잃은 ‘남도의 유관순’ 윤형숙(尹亨淑, 1900~1950) 게시기간 : 2025-06-25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5-06-24 10:42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항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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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유관순’ 윤형숙
전라남도 여수시 이순신공원의 항일역사기념탑에는 태극기를 쥔 한쪽 팔이 잘린 여성의 모습이 부조되어 있다. 이른바 ‘남도의 유관순’이라 불리는 윤형숙이다. 1919년 3월 10일 광주 시위대의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치다 일경이 휘두른 칼에 한쪽 팔을 잘렸다는 수피아여학교 학생 윤형숙, 일명 윤혈녀(尹血女)라고도 불린다.
![]() 필자는 몇 년 전 윤형숙에 대해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적이 있다. 보통은 발표문을 다듬어 학술지에 논문으로 싣지만 그때는 ‘설림(說林)’이란 어정쩡한 형태로 실었다. 풀어내지 못한 부분이 많아서다. 제법 이름이 알려진 인물인데 궁금한 점도 많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 『독립유공자공훈록』의 윤형숙 윤형숙은 1900년 9월 13일 전라남도 여천군 화양면 창무리에서 출생했으며, 1908년경 남원읍교회 신자인 당숙 윤성만의 집으로 입주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윤성만의 소개로 다시 1913년 순천의 미국남장로회 선교사 집으로 입주하며 은성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경 광주 수피아여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에 적극 참여했다가 크나큰 고초를 겪게 된다. 윤형숙은 조카인 윤치홍 선생(윤형숙열사기념사업회 이사장)의 오랜 노력 끝에 2004년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건국포장)로 추서되었다. 남도에서 이 만큼이라도 그가 알려지게 된 것은 전적으로 선생의 덕분이다. 다음은 『독립유공자공훈록』의 내용이다. … 당시 광주 수피아여학교 학생이었던 윤형숙도 동교 학생들과 함께 시위대열에 참가하여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행진하는 도중 일본 헌병대가 출동하여 해산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시위대가 해산하지 않자 헌병들은 실탄사격을 감행하며 무자비한 탄압에 나섰다. 일본 헌병은 선두에 있던 윤형숙의 왼팔을 군도로 내리쳤다. 팔이 잘린 윤형숙은 잠시 땅에 쓰려졌다가 일어나 오른팔로 태극기를 집어 들고 독립만세를 더욱 크게 불렀다. 이 광경을 목격한 군중들은 비분강개하여 더욱 격렬하게 항거하였다.
1919년 3월 10일 광주천변 장터에서 시작된 만세시위 때 선두에 섰던 윤형숙이 일본헌병이 휘두른 칼에 왼팔이 잘리자 오른팔로 태극기를 잡고 독립만세을 외쳤다는 것이다. 극적인 장면이지만 당시의 자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대부분 후대의 구전 자료이며, “광주에서 예수교가 주동한 폭동사건이 일어나 이 중 조선인 1명 부상, 경찰이 해산시킴”이란 일제측 전보(「대정8년~11년 조선소요사건서류」, 육군성)에 나오는 ‘조선인 1명 부상’이 윤형숙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정도이다. 이날 시위로 숭일학교 교사 4명과 학생 20명, 수피아여학교 교사 2명과 학생 17명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고 한다. 윤형숙 역시 부상을 입은 채 현장에서 체포되어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여기서 드는 의문, 한쪽 팔이 잘렸는데 법정에 나왔을까. 윤형숙은 판결문에 “다른 사람에 뇌동하여 독립운동에 참가한 자”라고 나온다. 50여일만에 법정에 나올 정도로 치료가 가능했을까. 아마도 궐석재판(闕席裁判)이 아니었을까. 당시 조선인이 발행하던 신문이 없었으니 기사로 실리지 않은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어째서 해방 이전 자료에 이같은 내용이 전혀 보이지 않을까(하긴 그 유명한 유관순도 판결문 빼고는 해방 이전 어떤 자료에서도 이름을 찾기 어려우니 그럴 수도 있겠다). 그가 4년 동안 ‘연금’ 또는 ‘유폐’되었다고도 하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전남지역 기독교측의 피해상황을 담은 『전남노회록』에서도 그의 부상은 확인되지 않는다. 올해 봄 독립만세사건으로 장로와 조사, 교인, 그리고 남·녀 학생들이 체포·수감되었으나 (감사하게도) 사망한 자가 없었고, 또 그동안 구금되었다가 풀려난 자들이 많다. 이 사건으로 체포·구속되어 옥고를 치른 자는 목사 2명(김창국, 윤식명), 장로 5명(남궁혁, 리문혹, 최흥종, 묵치묵, 곽우영), 조사 3명(김강시, 오석주, 한익수)이다. 태형을 받고 취조를 당한 교인들은 그 수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보고할 수 없다. 또 남자 교사 4명과 여자 교사 2명(박애순, 진신애)이 옥고를 치르고 있다. 남자 학생 20명과 여자 학생 17명이 복역 중이다. 노회 경내(境內) 학교 역시 독립만세사건으로 교문이 닫히고 큰 어려움을 당했는데, 만세시위가 끝나고 시간이 지나자 개학하게 되었고 또 재학생 수도 이전보다 많아졌다.
‘윤형숙’인가 ‘윤혈녀’인가?
![]() 『매일신보』 1919년 5월 4일자 판결문에 나오는 그의 이름은 ‘윤혈녀’이다. 우리 주변에서 이름에 ‘혈(血)’이 들어가는 경우는 찾기 힘들다. 그의 본명은 ‘윤형숙’인가 ‘윤혈녀’인가? 위의 판결문과 신문기사에는 ‘윤혈녀’, 1982년 작성된 호적에는 ‘윤형숙’, 수피아여고에 세워진 기념비에는 ‘윤혈녀’로 나온다(후손들도 이들이 동일인물이라는 점을 집증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어느 것이 본명이고 어느 것이 이명일까. 첫째, ‘윤형숙’이 본명이라면, 어째서 판결문에 ‘윤혈녀’라 나오는지 설명이 어렵다. 공문서이기에 이명을 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윤혈녀’가 본명이라면 1920년대 신문자료(『동아일보』 1927년 3월 1일자., 1927년 7월 7일자, 1927년 12월 7일자, 『중외일보』 1927년 3월 3일자)와 『순천노회록』(1947), 그리고 호적(1982)에 ‘윤형숙’이라 나오는 이유는 ‘개명’이어야 한다. 이에 대해 그의 제자인 김○만(전 국립여수수산대 교수)는 2003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 판결문(광주지방법원, 1919. 4. 30) “선생님(주: 윤형숙)이 하루는 저희들을 모이게 해서 선생님이 왜 외팔이가 되셨는지 말씀해주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수피아여학교를 다니시다가 독립만세사건이 일어나 태극기를 왼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는데 일본헌병이 그 광경을 보고 현장에서 태극기를 든 선생님의 왼팔을 잘라버렸다고 합니다. 그 순간 왼손에 든 태극기가 땅에 떨어진 것을 다시 오른팔로 집어 독립만세를 부르고 한동안 실신해 어찌됐는지를 몰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후 정신을 차려 살펴보니까 어딘지를 잘 알아볼 수 없고 다만 밀폐된 장소가 군부대 같은 곳이 아닌가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곳에서 군인의사 같은 사람이 와서 상처를 치료해 주는 것을 봤고 항상 그 의사가 와서 치료해줬다고 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상처가 좀 아물고 정신이 드니까 조사를 하기 시작하는데, 이름이 뭐냐고 물어 “윤혈녀다”라고 얘기했다고 합니다. 그런 뒤 나왔는데 광주에서도 못살게 하고 여수에서도 못살게 해서 먼 곳에 나가 살았다고 하셨습니다.
이같은 후대의 증언은 소중한 자료이나 전적으로 신뢰하기도 어려워 판단이 쉽지 않지만 매우 구체적인 정황을 담고 있어 참고할 만하다. 원산, 전주, 고창에서의 흔적과 여수로의 귀향 출옥 후 윤형숙은 광주를 떠나 함경남도 원산의 원산성경학원(일명 마르다윌슨여자신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만세시위 전력이 있기에 광주나 여수에서 활동하지 못하고 머나먼 타지로 이주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1927년경 전라북도 고창읍교회 부설 유치원 교사와 부녀야학 강사, 1933년경 전주성경학원 기숙사 사감으로 활동한 것이 확인된다. 하지만 자료가 부족하여 이주한 이유나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 윤형숙(오른쪽에서 두 번째): 출처 남도역사연구원 윤형숙은 1939년경 여수로 귀향했다. 어느 연구에 따르면 그는 “여수제일교회와 봉산기도처에 나가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치고 “여수읍교회의 집사로 충성되게 직분을 감당하고 순천까지 다니면서 노회에서 운영하는 순천성경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며, “마침내 1947년 3월 노회에서 실시한 전도사 자격시취에 통과하여 전도사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고, 이후 여수제일교회와 봉산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했다고 한다. 장로교 전도사로서 새 삶을 시작한 것이다. 한편 촬영 시기와 장소는 알 수 없으나 그가 학생들과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지역이 고창인지, 전주인지, 여수인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왼팔이 가려져 있다. 후손에 따르면, 사진을 찍을 때는 언제나 왼팔이 보이지 않도록 감췄다고 한다. 반공활동과 피살, ‘순교’와 ‘순국’ 여수에서 윤형숙이 전도활동에만 전념한 것은 아닌 듯하다. 그의 제자인 전 국회의원 신○범이 “남북이 갈려 이북에는 공산당이 있게 됐는데 공산당은 참 무서운 존재다”라고 말씀하곤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공산당은 있어서는 안될 존재라는 점을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그런 분이셨습니다”라고 회고했듯이, 윤형숙은 우익단체인 국민회 화양면지부 간사로 3년간 활동했다고 한다. 1963년 10월 열린 전국순국반공청년운동자합동위령자에서 수여된 표창장에도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조국의 자주통일을 위한 청년운동에 솔선 참가하여 반공전선에서 고귀한 생명을 바친 그 숭고한 반공정신을 찬양”한다고 나온다. 이승만이 1946년 5월 순천을 방문했을 때 순천중앙교회에서 환영회가 열렸으니 이때 두 사람이 어떤 형태로든 만났을 것이다. 이승만은 여순사건 이후인 1949년 4월에도 대통령으로서 순천을 방문했다(이후 윤형숙이 경무대에서 그와 면담했다고도 하나 신뢰하기 어렵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여수를 점령한 인민군은 피신한 윤형숙을 찾아내서 고문했으며, 그 때문에 그는 오른쪽 눈을 실명했다고 한다. 일본헌병의 진압에 한쪽 팔을, 좌익분자의 폭력에 한쪽 눈을 잃은 것이다. 그리고 UN군이 서울을 수복한 9월 28일, 수세에 몰린 인민군은 73명의 이른바 ‘우익인사’들을 미평리 과수원에서 총살했다. 선교사 자료에 나오는 희생자 “여수교회 전도부인 윤씨”가 바로 윤형숙이다. 이 날 희생된 이들 중에는 목사인 손양원과 조상학, 여수기독교청년회 간사 김웅기, 여수교회 집사 허상용과 김재선, 신학생 지한영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인민군이 이들을 살해한 이유는 ‘우익활동’ 때문일 수도 있고 ‘기독교’ 때문일 수도 있으며, 둘 다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윤형숙의 희생 역시 ‘순국(殉國)’일 수도 있고 ‘순교(殉敎)’일 수도 있으며, 둘 다일 수도 있다.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의 ‘순국열사 윤형숙’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왜적에게 빼앗긴 나라 되찾기 위하여 왼팔과 오른쪽 눈도 잃었노라. 일본은 망하고 해방되었으나 남북·좌우익으로 갈려 인민군의 총에 간다마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여 영원하라.”
![]() 더 밝게 빛나야 할 항일의 성좌 앞서 언급했듯이 필자는 몇 년 전 윤형숙에 대해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적이 있지만 난제들을 풀어내지 못했다. 애국지사로서, 순국열사로서 그에 대해 밝혀내야 할 것들이 여전히 많은데, 조카 윤치홍 선생의 아낌없는 지원과 격려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역량이 부족했다. 이런저런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연구했지만 근현대사는 고대사와 달리 추론에 한계가 있기에, 안타깝지만 막연하게 후일을 기약하고자 한다. 그는 항일의 성좌에서 빛나고 있지만 소임을 다하지 못한 필자의 마음은 어두워진다. 글쓴이 한규무 광주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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