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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학산책

[고문서와 옛편지] 시폐를 직설하다 게시기간 : 2021-08-18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1-08-17 11:04

조회수 : 219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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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와 옛편지 마흔 두 번째 이야기2021년 8월 18일
마흔 두 번째 이야기
   

시폐를 직설하다

"거꾸로 나오려던 아기도 돈만 주면 순산합니다."

 

정조의 기다림, 긴 글 짧은 만남.

1796년 3월 7일. 정조는 아침 일찍 밀봉되어 올라온 상소 하나를 이제 막 열어 보았다. 두루마리가 제법 묵직한 것으로 보아 꽤 긴 글임을 알 수 있었다. 정조는 기대감이 한껏 부풀어 올라 있었다. 어제 처음으로 만나 본 70대 노인은 70대답지 않았다. 묻는 말에 또렷이 응대하는 걸 보니 50대 장년 모습이었다. 겸손했지만 70년을 산 사람에게만 있을 법한 노련함과 당당함이 뿜어져 나왔다. 먼 시골 장흥에서 살아온 노인으로서 임금 앞에서 기가 죽을 법도 하건만, 그런 모습은 전혀 없었다.

이 사람을 장흥으로부터 불러 올려 만나기까지에는 무려 석 달이나 걸렸다. 전라 감사에게 그를 찾아 한양으로 올려 보내라고 명을 내렸지만 왜 그리 꾸물거리는지, 정조는 2월 내내 독촉했다. 2년 전 호남의 사정을 살피러갔다 돌아온 서영보(徐榮輔)는 그를 “문학이 뛰어나고 경전에도 두루 통달했으며, 학식이 매우 해박”하다고 평가하면서, 이런 사람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것은 관료들의 잘못이고 애석한 일이라고 하였다. 또 그가 저술했다는 『환영지』는 얼마나 치밀하고 해박했던가. 정조는 이미 마음 속으로 탄복했었다. 직접 만나 보고 싶은 마음은 더 간절했다. 그를 만난 정조는 평소 마음 속에 담고 있던 말을 소상히 글로 써서 알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하룻밤 사이에 꽤나 긴 상소문을 써서 밀봉해 올렸던 것이다. 긴 글 속에 그는 어떤 말을 하였을까. 궁금증과 기대감을 품고 정조는 상소를 읽었다.

1796년 1월 말 무렵, 위백규는 전라 감사로부터 빨리 한양으로 올라가 임금을 뵈라는 연락을 받았다. 뜻밖의 소식이었다. 70 평생 장흥에서 살았고, 벼슬 한번 해보지 않았다. 자신의 출신에 대해 ‘삼벽(三僻)’이라고도 했었다. ‘지리상, 가문상, 인맥상 궁벽’하다는 말이다. 장흥이라는 곳이 궁벽하고, 집안도 한미하며, 아는 사람이라고는 몇 사람에 불과하고 그것마저도 고관이나 위세가 대단한 집안 사람들도 아니라는 말이다. 일 년 전 『환영지』를 올려보내라는 명을 받고 올려 보낸 일은 있어지만, 위백규는 임금이 직접 자신을 부르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임금이 보자고 한 것이다. 선공감부봉사(繕工監副奉事)라는 벼슬까지 내렸다.

위백규는 선뜻 나서지 못했다. 아직 겨울 추위가 끝자락을 거두지 않은 데다 나이는 70대이고, 아프기까지 했다. ‘날씨가 풀리는 상황을 보아 임금을 뵈러 가겠다.’고 했건만, 임금이 또 재촉한 모양이었다. 2월 16일에 허둥지둥 서둘러 길을 떠나 보름 여만에 한양에 도착했다. 과거 공부에 매진하던 시절에 살았지만 30대 후반에 떠난 후 몇 십년 만에 다시 밟아보는 한양땅이었다. 3월 3일에 도착하여 옛날을 회상할 겨를도 없이 3월 6일, 희정당(熙政堂)에서 정조를 뵈었다. 황송하게도 임금은 『환영지』를 보고 ‘박식함을 알 수 있었다.’고 칭찬했다. 그리고 ‘나라 다스리는 일에 관해 말하고 싶은 내용을 글로 써서 올리라.’고 하면서 붓과 종이까지 하사했다.

명을 받고 물러나온 위백규 마음과 몸은 바빠졌다. 상소를 써야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14년 전 계묘년에 두서 없이 써 놨던 초고를 집안 조카가 갖고 있었다. 글자 수를 센 다음, 13명 서리들이 글자를 나누어 베꼈다. 상소문은 거의 7800자에 가까운 분량이었다. 한 사람당 600자 정도를 베껴 쓴 셈이다.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었으니 틀려서도 안 되고 반듯하게 써야 했다. 위백규는 밤새 이 일을 지켜보았다. 70대 노인에게는 매우 버겁고 힘든 일이었다. 6일 오후에 시작하여 밤샘하고 7일 아침에 완성하여 임금에게 올릴 수 있었다.

 

폐단을 직설하다

위백규가 이 때 올린 글은 만언봉사(萬言封事)이다. 만언이란 글자 수가 많기가 거의 만 자에 가깝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봉사(封事)는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 곧 상소문의 일종이다. 봉(封)은 밀봉(密封)함을 말한다. 왕에게 올리는 글은 승정원 등을 거쳐 왕에게 전해진다. 이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기도 한다. 그러나 봉사의 글은 밀봉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다. 그래서 봉사는 임금이 맨 첫 독자가 된다. 위백규는 상소문을 작성한 다음 단단히 밀봉해서 아침에 올린 것이다.

상소에서 그는 6가지에 관해 말했다. 임금이 뜻 곧 마음가짐을 잘 세우기, 보필하는 신하를 잘 뽑아 쓰기, 염치를 강조하여 사회 기강을 잘 잡기, 선비들의 풍속을 바로잡아 출세 위한 심한 경쟁 억제하기, 탐욕스런 행위를 단속하고 사치를 금지하기, 옛 제도를 따르며 좋지 않은 정사나 제도 고치기 등이다.

 

  첫째, 임금이 뜻을 세울 때는 1등으로 치는 요순을 모범으로 해야하며 2,3등에 속하는 이들을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무엇보다 ‘성의(誠意)’, ‘정심(正心)’을 강조했다. 임금의 지향이 바르게 되어야 나라가 바르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인물을 등용할 때에는 덕행과 역량을 기준으로 해야하며, 모든 관직에 모두 다 임명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림1

『존재집』에 실린 만언봉사(부분)

어떤 자리나 직책에 부합하는 사람을 임명해야 하며, 적합한 사람이 없다면 굳이 그 자리에 사람을 채워넣을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재상까지 올라가고, 어떤 자리가 비게 되면 그 자리를 채우던 당시 관료 임명 관례를 감안하면, 획기적인 발상이다.

세 번째는 사회 기강에 관한 것으로 예의와 염치를 강조했다. 평민이나 하인들이 사대부의 예를 행하고, 장사꾼들이 궁과 관청의 복식이나 음식을 그대로 따라 하는 세태를 비판했다. 이는 곧 신분에 따른 예가 있는데 그것들의 경계가 희미해져 사회 기강이 무너졌다고 진단한 것으로, 신분에 맞는 예의를 준수하는 풍속을 만들어갈 것을 주장하고 있다.

네 번째는 출세를 위한 경쟁이 과열되면서 뇌물, 청탁이 널리 퍼져 있는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를 억제하는 방안을 마련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다섯 번 째는 특히 관리들의 탐욕과 사치를 금지할 것을 강조하였는데,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고, 돈을 제일로 치는 사회 분위기를 적나라하게 임금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섯 번째는 법 시행과 제도 개선이 잘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특히 법이 조선후기 상황에 맞게 개선되어 『수교집록』 『대전통편』 등이 마련되었지만 완전히 무시되는 관례, 과거『군사』공안(貢案) 등 백성의 일상과 직결되는 제도들을 현실에 맞게 개선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림2

위백규가 올린 만언봉사에 대해 정조가 내린 비답, 장흥방촌박물관소장, 이미지출처: 최순권, 『방촌유물전시관 기증‧기탁품도록』
(위백규를 ‘이(爾)’ 즉 ‘너’라고 부르고, ‘답왈(答曰)’이라는 표현이 없다. 당시 위백규의 벼슬 품계가 2품 이하였기 때문이다.)


繕工副奉事魏伯珪萬言封事批答
省疏具悉。旣徵稿而得其所存矣。又賜對而敲其所抱矣。聞有十年硏究。著爲萬言封事者。又命大農而給筆札矣。今見其章。誠富且贍矣。初一立志明學之奏。予庸嘉乃。予志不立也。故民志不能一。正學不明也。故邪學不能熄。莫非予反省處。當體念。其二簡弼擧賢之奏。予庸嘉乃。以人事君。大臣之責耳。剔蔽拔茅。野無遺贒。竊有望於今日巖廊。次三次四次五次六。言言剴切。切中時弊。四維之不張。莫近日若也。國綱之不振。惟是時卽。然躁競甚而士趨日卑。侈汰極則貪風日盛。無復古昔之彝憲。而稗政疵法。指不勝摟。每中夜以思。繞榻不寐。自顧初心。不覺顔發騂也。爾以遐陬踈蹤。能竭論至此。求聞所以求益也。就中大比之歲。方伯節度守令之薦人與科擧文體之不如法則削其榜事。令廟堂消詳稟覆。俾有導之以言之實效。爾年七十。承召上來。只令依願還鄕。則眞所謂去來何所聞見。且欲遲待計仕。有甚於馮老之郞潛。畀以一邑。得施所蘊。
 

첫 번째를 제외하고 나머지 다섯 개 항목은 당시 사회 문제 중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할 것들이었다. 이 상소를 보고 정조는 비답(批答)을 즉시 내렸다. 비답이란 신하가 올린 글에 대해 임금이 응답하거나 명을 내리는 글이다. 아침에 올라온 7800여 자의 긴 상소를 보고 저녁 즈음에 응답을 했던 것이다. 비답에는 특히 ‘세 번째부터 여섯 번째까지 모두 절실하고, 현재의 폐단을 적확하게 짚어냈다.’는 칭찬과 탄복을 담았다.

 

만언(萬言)만큼 일 나고 말 많았던 만언봉사

어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올곧게 말할 경우, 지적 대상이 되는 이들이 화를 내는 경우가 많다. 위백규의 글은 금세 궁 밖으로 퍼져 나갔다. 실제 정조는 이 글을 신하들에게 내려 보게 했던 듯하다. 며칠 후 정조는 그 때 우의정이었던 윤시동(尹蓍東)에게 이 글을 읽어 보았느냐고 물었고, 윤시동은 자세하게 보지는 않았다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런데 이 상소 내용이 퍼지면서 논란이 일어났다. 위광익(魏光翼)은 위백규 집안 사람이었는데 7 한양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만언(萬言)의 상소는 시폐(時弊)를 적확하게 말했는데도, 그 사이 여러 사람들의 말과 비방이 여기저기서 일어났습니다. 태학에서는 권당을 했고, 사학에서는 통문도 발송했습니다. 중신들도 상소를 배척하였으니, 직언이란 예부터 받아들여지기가 어려운 것인가 봅니다.”

 

  이 상소를 듣고 가장 화를 낸 이들은 성균관 유생들이었다. 상소에 ‘태학 유생들이 일년 내내 책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고, 하루 종일 의리에 대해 논의하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며, 떼지어 떠들기나 하고 음식만 허비한다.’는 내용을 문제 삼은 것이다. 성균관 유생들은 자신들을 비난했다고 하면서 저녁 식당에 불참했다. 『일성록』에 ‘3월 19일에 태학 유생들이 권당(捲堂)했다.’고 했는데, 권당이란 이른바 단체 행동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시위이다. 위백규가 올린 상소 내용이 자신들을 비방했다고 생각하여 성균관 유생들은 저녁 식사 때에 단체적으로 거부하고 참석하지 않았다. 성균관 유생들의 단체 행동 자체가 초래하는 사회적 파장이나 의미가 꽤 컸던 때였으므로, 이는 떠들썩한 사건이 되었다.

 

그림3

위광익(魏光翼)이 1796년 4월 7일에 위백규에세 쓴 편지. 위백규의 만언봉사 내용에 대해 당시 성균관 유생 및 대신들이 배척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한국학호남진흥원 소장, 이미지출처 : 권수용 엮음, 『장흥위씨존재고택』호남한국학 기초자료해제집2)

게다가 상소에 쓴 표현이 불경(不敬)하다는 비판도 있었다. 위백규는 돈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폐단을 언급하면서 ‘아기가 거꾸로 나올 때에도 돈만 주면 순산한다.’는 표현을 썼다. 문제가 된 표현은 ‘도산(倒産)-아기가 거꾸로 나오는 일’이었다. 당시 판중추부사였던 윤숙(尹塾)은 백성들이나 쓰는 저속한 말을 감히 임금 앞에서 썼다고 하면서 선비로서의 체모를 잃었다고 했다. 또 위백규에 대해 ‘잡술(雜術)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자’라고 비방했다. 위백규의 만언봉사는 세 자료에 실려 있는데, 『존재집』에는 전문(全文)이 실렸고, 『정조실록』에는 요약적으로 서술되었다. 『일성록』은 거의 모든 내용을 다 실었지만 ‘도산’을 언급한 내용만 빠져 있다. ‘도산’이 출산과 관련된 말이지만 임금 앞에서 쓰면 불경한 표현이었으므로 삭제하였던 듯하다. 헌납이었던 한흥유(韓興裕)도 가세하여 ‘남쪽에서 온 선비의 말은 세상을 속이는 것인데도 분에 넘치게 목민관이 되었다.’고 하면서 정조가 위백규를 옥과현감으로 임명한 일에 대해 불평을 쏟아냈다. 위백규가 한양을 떠나자마자 상소 내용이 급속히 퍼지면서 생각지도 못한 일과 말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소신을 갖고 상소했지만 위광익이 전해준 한양 분위기에 위백규는 마음이 편치 않았던 듯하다. 옥과현감으로 부임하여 목민관으로서 일을 한 지 40여 일이 지난 즈음에 사직을 청하는 글을 올렸다. 자신의 상소로 인해 성균관 유생들이 단체 시위 행동을 하고, 대신들이 상소까지 해가면 거론했다는 사실 때문에 편치 않으니 사직하겠다고 했다. 자신이 쓴 상소문의 표현이 논란거리가 되었다는 소식에 대해 바닷가에서나 살던 늙은 이가 생각지도 못한 상태에서 임금의 질문에 대답하게 되면서 ‘자신의 말이 주변 사람들을 거슬리는지 생각도 않고 비루하고 저속한 말도 가리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정조의 굳은 신뢰와 지지, 견고해지는 만언봉사 의미

유생들의 단체 행동, 대신들의 비방에도 위백규에 대한 정조의 신뢰는 대단했던 듯하다. 옥과현감에 임명한 것은 평소 위백규가 마음에 품고 있던 기대와 역량을 펼쳐 보일 기회를 준 것이었다. 성균관 유생들이 들고 일어났을 때에는 ‘성균관에서 초야의 선비 말을 용납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은근히 유생을 질책했고, 대신들이 위백규를 비난했을 때에는 ‘마치 위백규가 망발이 난 것처럼 공격하여 오히려 초야에 있는 선비들의 진솔한 말을 이끌어내기가 어렵다.’고 불평을 토로하기도 했다. 정조는 즉위 직후부터 초계문신제도를 신설하는 등 인재를 양성하면서 한편으로는 지방에 숨겨져 있는 경륜있는 이들을 발탁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위백규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서영보가 장흥에 가 위백규에 대해 직접 듣고서 천거했고, 정조는 이에 부응하여 위백규의 자질과 역량을 인정했던 것이다.

 

만언봉사, 긴 만큼 긴 시간의 경륜과 사유를 담다.

만언봉사는 그 길이가 길고 분량이 많은 만큼 짧은 시간에 이루어질 수 없다. 위백규는 거의 10여 년 동안 고심하여 완성했다고 한다. 그는 30대 후반 이후 과거 시험에 더 이상 응시하지 않았다. 대신 한양에서 장흥으로 돌아와 몸소 농사를 지어 일반 백성들의 농촌 생활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한편으로는 선비답게 당대 사회에 있던 다양한 폐단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고 그것을 기록하면서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개혁 방향을 고민하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정현신보(政絃新譜)』남기기도 했다.

그의 만언봉사는 70년 동안 장흥이라는 향촌 생활 경험, 현실에 밀착한 생활, 백성과 함께 부대끼고 농삿일을 몸소 한 일상 경험으로부터 얻은 체험과 현실 감각이 스며든 글이다. 여기에 60여 년간 다양한 분야의 글을 읽었던 독서 경륜의 광활함, 사유의 깊이감도 담아냈다.

위백규가 만언봉사에서 보여준 조선후기 사람들의 삶, 세태, 사회 모습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그의 만언봉사는 현대에도 여전히 가치있는 삶의 나침반으로서 기능할 수 있지 않을까.

 

<도움 받은 글>

권수용(2020), 『장흥위씨 존재고택』(호남한국학기초자료해제집2), 한국학호남진흥원.
김덕진(2014), 「존재 위백규의 현실인식과 경제 개혁론」, 『한국실학연구』27,한국실학회.
노인환(2015), 「조선시대 批答의 문서 유형 연구」, 『고문서연구』47, 한국고문서학회.
박학래(2018), 「존재 위백규의 교육개혁론과 그 도덕교육적 함의」, 『동양고전연구』72, 동양고전학회.
이강욱(2020), 「조선후기 신민의 상달문서에 대한 국왕의 판부 방식」, 『고문서연구』56, 한국고문서학회.
최순권(2010), 『방촌유물전시관 기증‧기탁품도록』, 장흥군.

글쓴이 김기림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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