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HONAM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홈페이지 서비스 메뉴

검색창

전체메뉴
본문 시작

호남학산책

[옛 그림 이야기] 대나무 숲 맑게 갠 비 게시기간 : 2021-05-19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1-05-17 09:50

조회수 : 239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옛 그림 이야기

이전 글 보러가기 ▶︎
호남학산책
옛 그림 이야기 두번째 이야기2021년 5월 19일
두번째 이야기
   

대나무 숲 맑게 갠 비
동강 정운면의 <죽림청우(竹林晴雨)>

 

푸른 대나무 숲에 비가 내리다가 갠 싱그러운 계절을 담은 그림이 있다. 동강 정운면(東岡 鄭雲葂, 1906-1948)이 그린 <죽림청우(竹林晴雨)>이다(그림 1). 화면 가운데 우뚝 솟은 산과 그 앞으로 마치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다각형 돌기둥이 웅장하면서도 기이한 느낌을 주는 그림이다.

그림1

그림1 정운면, <죽림청우>, 1940년대 초, 종이에 엷은 색, 166.0×146.0cm, 부국문화재단 소장

 

서석산방(瑞石山房)의 정운면

 

이 그림을 그린 동강 정운면은 20세기 초 허백련과 함께 광주전통화단을 이끈 주요한 화가로 꼽힌다. 1906년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실마을에서 송강 정철(松江 鄭澈)의 12대손으로 태어난 정운면은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에 <묵매>를 시작으로 여러 번 입선을 하면서 화가로서 촉망받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주로 사군자로 출품하였으며 특히 매화그림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림2

그림 2 정운면, <추산만애>,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

 

그림3

그림 3 정운면, <산수>,
1932년, 168.5×89.3cm,동강대박물관소장

 

1920년대 후반 소정 변관식(小亭 卞寬植, 1899-1976)이 광주에 잠시 내려와 있었을 때 정운면은 그에게 산수화를 배웠다. 변관식은 조선시대 마지막 화원인 소림 조석진(小林 趙錫晋, 1853-1920)의 외손으로, 허백련, 심향 박승무와 함께 전통적인 남종화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변관식은 갈필로 여러 번 붓질을 반복하여 짙은 묵묘(墨描)에 의한 암시적 분위기를 보이는 당시 일본 남화풍의 필치를 구사하였다. 이 시기 변관식의 화풍을 그대로 전해 받은 정운면의 산수화도 같은 경향을 보이는데, 1931년 제10회 선전에 입선한 <추산만애(秋山晩靄)>라는 제목의 산수는 변관식의 화풍과 많은 유사성을 보인다(그림 2). 아스라한 느낌의 둥글고 성긴 산세와 나무를 표현한 이 작품은 전 화면을 짙은 묵점을 이용하여 근경에는 잡목 몇 그루를 그려 넣고 중경에는 초가집 몇 채와 역시 잡목을 채워 넣었다. 원경의 산은 멀리 후퇴한다기보다는 화면 중앙으로 시선이 모아지게 갈필을 사용하여 여러 번 먹을 집중적으로 덧칠하였다. 1932년에 제작된 <산수>는 <추산만애>와 같은 구도를 응용하여 다시 그린 것일 것이다(그림 3). <산수>의 화면 왼쪽 상단에 ‘임신초하가서석산방정운면(壬申初夏家瑞石山房鄭雲葂)’이라 써 있다.

선전에 입선을 하면서 서울화단에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정운면은 30년대 초 서울을 왕래하면서 1935년과 36년 서화협회에 정회원으로 참여하며 그림을 출품하였다. 이때 탄월 김경원(灘月 金景源, 1901-1967), 제당 배렴(霽堂 裵濂, 1911-1968), 고암 이응노(顧菴 李應魯, 1904-1989) 등과 친분을 쌓으며 교유하였다. 이들은 후소회(後素會)나 청전화숙(靑田畫塾)에 적을 두고 활동했던 화가들이다. 정운면은 이들과의 교유를 통해 당시 선전에 이식된 일본화풍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한편 정운면은 서울화단과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1938년 허백련과 함께 연진회에 참여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이 시기는 연진회의 목적과 부합하는 전통적인 남종화법을 사용하였으며 허백련 못지않은 남종화풍의 필치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운면의 화풍이 바뀌기 시작한다. 이때 그려진 그림이 바로 <죽림청우>이다.

 

무등산 규봉 주상절리와 닮아 있는 그림

 

<죽림청우>의 이 기이한 풍광은 실재하는 곳일까. 정확하게 어느 곳인지 특정 지을 수는 없지만 이곳은 무등산을 연상시킨다. 무등산은 무돌뫼, 서석산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정운면은 자신의 그림에 간혹 ‘서석산방에서 그렸다’라고 써놓기도 했는데 이는 정운면의 거처 혹은 작업실이 무등산 근처였음을 짐작케 한다. 그림에 그려진 바위기둥들은 입석대나 서석대가 아닌가 싶지만, 돌기둥이 병풍처럼 펼쳐진 모습은 무등산 규봉 주상절리를 닮았다(사진1, 2). 광석대라 불리는 이곳은 서석대, 입석대와 함께 3대 주상절리로 꼽힌다.* 예부터 고봉 기대승, 삼연 김창흡 등 많은 문인들이 이곳의 아름다움을 시로 남겼던 곳이다.

 

사진 1

[사진 1] 무등산 규봉암 전경

 

사진 2

[사진 2] 무등산 규봉 주상절리와 규봉암

 

그 가운데 고려 말 문인인 김극기(金克己, 1379-1463)는 「규봉사(圭峯寺)」라는 시에서 이곳의 정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기이한 모양이라 이름 붙이기 어려운데        詭狀石難名
올라보니 만물이 가지런도 하여라 登臨萬像平
돌 모양은 비단을 오린 듯하고 石形裁錦出
봉우리 형세는 옥을 쪼아 이룬 듯 峯勢琢圭成
명승을 밟으니 속세의 자취 사라지고 勝踐屛塵跡
그윽한 곳에 사니 도의 마음 더해가네 幽捷添道情
어찌하면 속세의 그물 던져 버리고 何當抛世綱
가부좌 틀고 무생의 도리 배울까 趺坐學無生
 
* 사진출처: 유네스코 무등지오파크 http://geopark.gwangju.go.kr/gallery.do?S
** 이 시의 번역은 김대현 편역, 『무등산 한시선』(전남대학교출판부, 2016), pp 16-17.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기이한 기둥모양의 바위가 서있는 중앙의 큰 산과 근경 사이에는 정자와 초가집 한 채가 있고 그 뒤로는 대나무가 울창하다. 초가의 주인은 방문한 벗과 정자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원래 무등산 규봉 주상절리 앞에는 규봉암이 자리하고 있는데 화가는 이를 규봉암 대신 선비가 머무는 공간으로 대체하였다.

 

그림 1-1

그림 1-1 정운면, <죽림청우> 세부

 

그림 1-2

그림 1-2 정운면, <죽림청우> 세부

 

화면 중앙의 바위산은 마치 튀어나올 것처럼 묘사되어 있고 그 위의 수목들은 빽빽하게 가지를 뻗고 있다. 바위산 뒤쪽 먼 산들은 습윤한 안개로 아스라이 처리되어 있다. 주변의 경물은 중심을 향해 마치 모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느낌은 오른편에 서있는 바위가 마치 중앙을 향해 기울어진 것처럼 표현함으로써 얻어지는 효과이다. 이를 화폭에 다 담기 위해 시점을 부감법(俯瞰法)으로 표현하였다.* 그래서인지 깊고 내밀한 곳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준다.

 
* 부감법(俯瞰法): 그림의 구도를 잡는 방법 중 하나로, 그림의 시점을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전체를 조망하는 관점으로 그리는 방법을 말한다. 조감법이라고도 한다.
 

초록빛 색점의 청우(晴雨)

 

<죽림청우>는 화면 가득 꽉 찬 구도와 전 화면을 아우르는 푸른색의 색점에 압도되는 그림이다. 그림사이즈도 상당히 큰 대폭(大幅)의 산수화이다. 제목처럼 대나무 숲의 비 내리고 갠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화면 전체에 푸른색과 초록색의 색점을 하나하나 찍어 메웠다. 근경에는 다양한 빛깔의 연두색, 초록색, 청록색 등을 사용해 표현된 나무들과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덩굴 등이 매우 섬세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다. 정자와 초가집을 둘러싸고 있는 대나무 숲과 화면 오른쪽 절벽 표현도 약동적이다. 마치 인상주의 작품을 보는 것 같다.

 

그림 1-3

그림 1-3 정운면, <죽림청우> 세부

 

그림 1-4

그림 1-4 정운면, <죽림청우> 세부

 

화면을 전체를 점으로 덮는 기법은 1940년 무렵 임인 허림(林人 許林, 1917-1943)과 남농 허건(南農 許楗, 1908-1987)이 화면에 볼록하게 튀어나올 정도의 황토안료를 두껍게 사용한 토점법(土點法)이라는 방식으로 구사하고 있었다. 정운면은 특히 허림과 전시회도 같이 개최하고 교유하면서 화풍 상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허림, 허건이 사용했던 토점법과는 달리 정운면은 도드라지는 표현 대신 화면 전체에 걸쳐 엷은 초록색과 담먹으로만 점을 찍어 표현하고 있다.

 

동강바람

 

정운면은 연진회 활동을 하면서 전통적인 남종화법의 산수화를 비롯해 당시 화단의 경향에 발맞추어 신감각의 산수화도 제작했다. <죽림청우>가 이에 해당한다. 이에 더 나아가 정운면은 특히 일본화풍, 즉 신화풍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1942년 일본 문부성전람회(이하 문전)에 <신록의 계류(新綠ノ溪流)>라는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하였다(그림 4).

정운면은 이 작품에서 앞의 작품들과는 다른 큰 변화를 보여준다. 이때까지 정운면의 산수화풍은 변관식 화풍이 남아 있는 전통화법을 보여주고 있었으나 문전에 입선한 작품에서는 선이 부드럽고 섬세하며 필법보다는 채색 위주의 일본화 영향이 두드러진 것이었다. 이렇게 그의 화풍이 급변한 것은 그가 교유했던 인물들의 영향 과, 문전에 입선하고자 하는 정운면이 일본 심사위원들이 좋아할만한 필법을 적극적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로 인해 허백련과 의견 충돌을 빚게 되었다. 허백련은 정운면이 자신과 함께 연진회에서 남화운동을 일으킬 것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일본화의 영향을 받아 필법을 바꾼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이 일로 정운면과 허백련은 크게 말다툼까지 했다고 한다.

 

  정운면은 허백련과 달리 전통적인 화법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는 시대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새로운 미감과 양식을 추구하였으며 작품에 그것을 투영하려고 하였다. 1943년 일본으로 건너가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을 만난 정운면은 그의 문하에서 잠깐 동안 그림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해방 이후 부드럽고 섬세한 필선으로 온화한 남종화풍의 산수화 양식을 이루어가던 그였으나, 1948년 서울에서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던 중 복막염에 걸려 4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변관식으로부터 시작하여 전통남종화풍을 섭렵하고 거기에 화단의 새로운 화풍을 접목해 개성적이고도 참신한 작품을 보여준 정운면은 전통화풍을 중시하던 광주화단에서 철저한 전통주의보다는 시대적인 표현을 작품에 담으려고 했다. 정운면의 작품은 ‘동강바람’이라 불릴 정도로 색다른 신감각을 보여주며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해 광주 전통화단을 이끈 주요 화가로 평가된다.

 

그림4

그림 4 정운면, <新綠ノ溪流>, 1942년, 제6회 문부성전람회, 일본

 

참고문헌 및 인용출처

 
김대현 편역, 『무등산 한시선』, 전남대학교출판부, 2016.
김소영, 「東岡 鄭雲葂의 生涯와 繪畵世界」, 『호남문화연구』43(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08), pp. 139-174.
김소영, 「근대기 광주 전통화단의 형성과 전개」, 『호남문화연구』67(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20), pp. 187-224.
李龜烈, 「近代 湖南畵壇의 전개」, 『湖南의 傳統繪畵』, 국립광주박물관, 1984, pp. 170-191.
이태호, 「남도의 전통회화-전남화맥을 이룬 작가들을 중심으로」, 『전남의 문화와 예술』전라남도, 1986.
http://geopark.gwangju.go.kr/gallery.do?S
 
글쓴이 김소영
전남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사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Copyright(c)201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All Rights reserved.
· 우리 원 홈페이지에 ' 회원가입 ' 및 ' 메일링 서비스 신청하기 ' 메뉴를 통하여 신청한 분은 모두 호남학산책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호남학산책을 개인 블로그 등에 전재할 경우 반드시 ' 출처 '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