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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학산책

[선비, 길을 열다] 무등의 오열, 조광조의 상여를 보내며 게시기간 : 2020-06-23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0-06-22 15:27

조회수 :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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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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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길을열다 스물아홉 번째 이야기2020년 6월 23일
스물아홉 번째 이야기
   

무등의 오열, 조광조의 상여를 보내며

1519년 11월 17일 아침 조광조는 옥문을 나서 유배에 올랐다. 화순 능주에서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1)

 
누가 화살 맞아 상처 난 새의 신세를 가련타 하리, 誰憐身似傷弓鳥
말 잃고 외양간 고치는 늙은이 마음 같아 절로 우습네. 自笑心同失馬翁
잔나비와 학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성화를 부리겠지만, 猿鶴正嗔吾不返
어찌 엎어진 항아리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알리오. 豈知難出伏盆中
 

그러나 원망은 없었다. 그렇게 보름 남짓, 펑펑 눈이 쏟아지고 바람이 세차게 불던 날, 사약을 받았다. 1519년 12월 20일, 향년 38세. 그간 매일 찾아온 양팽손(梁彭孫)에게 유시(遺詩)를 건넸다.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였고, 愛君如愛父
나라를 내 집처럼 근심하였네. 憂國如憂家
세상 굽어보는 저 해 아래, 白日臨下土
충정을 밝게 비추리. 昭昭照丹衷
 

양팽손(1488∼1545)은 열아홉 살 때 조광조가 용인에 있을 때 방문하며 지란지교를 맺었던 후배 동료로서 파직되어 고향 능주로 내려왔었다. 이듬해 봄 용인 심곡리 선산으로 가는 상여를 붙잡고 박상이 오열하였다.2) “작년 무등산 앞에서 서로 손을 붙잡았는데, 수레에 실려 쓸쓸히 고향으로 돌아가다니. 훗날 지하에서 우리 상봉하던 날, 인간 만사 그름을 말하지 않으리라.”

당시 박상은 모친상 마치고 광주에 머물렀다. 광주에서 화순 넘어가는 무등산까지 마중을 나갔던 것이다. 또한,

 
작년 분수원 앞에서 서로 손을 맞잡고서, 分手院前曾把手
그대가 황각에서 주애라니 괴이하였지. 怪君黃閣落朱崖
주애와 황각을 분별하지 마시게나, 朱崖黃閣莫分別
황천에 이르면 아무런 차등이 없으리. 纔到九原無等差
 

무등산에서 나온 거센 물길이 둘로 나뉘는 광주 읍성 남쪽에 있던 관영 숙소 분수원(分水院)을 박상은 악수를 했다는 ‘분수원(分手院)’으로 적었다.3) 황각은 조정이고 주애는 유배지, 넷째 줄 ‘무등차(無等差)’가 아릿하다.

조광조가 죽음을 받으면서 함께 유배를 당한 김식ㆍ김정ㆍ기준 등도 죄가 가중되어 절도와 극변에 안치되었다. 이때 고향 보은에서 멀지 않는 금산에 유배된 김정은 수령의 허락을 받고 모친을 뵈러 갔다 오고, 기준은 아산 귀양길에 백형이 무장현감으로 부임하며 모친을 모시고 간다는 소식을 듣고 직산에 가서 인사하고, 이후 언제나 모친을 다시 뵐 수 있을까 산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며 서성대다가 그만 도망죄에 걸려 무서운 형장을 받았다. 그런데 부친 묘소가 있고 노복이 살았던 선산으로 유배된 김식은 참혹하였다. 평소처럼 인근 문객의 방문을 받고 담소하다가 조광조 사사 소식을 듣고선 자신 또한 머지않아 죽음을 받으리라 탄식하며 통음하고 잠들었는데, 새벽에 깨어보니 노복에 업혀 유배지를 한참 벗어났다. 결국 덕유산ㆍ지리산을 헤매고 무주, 창녕의 영산, 함안의 칠원을 찾아 지인들의 신세를 졌다. 그렇게 다섯 달, 덕유산 동쪽 끝자락 거창 고제원 백암에서 자신의 망명을 변명하는 상소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1520년 5월 16일, 향년 39세. 다음은 절명시.

 
해는 저물어 하늘은 어두침침, 日暮天含黑
산은 비고 절은 구름 속에 들었네. 山空寺入雲
군신의 의리는 천년을 가는 것, 君臣千載義
외로운 무덤을 어디에 둘거나? 何處有孤墳
 

그런데 김식은 망명 중에 광주의 박상까지 찾았는데, 다음과 같은 한숨 깊은 질책을 받았다고 한다.4) “남곤은 소인의 뛰어난 두목으로 그 간교한 처사는 처음과 끝을 알 수 없다. 지금 인군을 현혹하여 권세를 잡고 있는데 어찌 이런 틈새를 보여 구실을 주었던 말인가!”

 

남곤은 실로 ‘소인의 뛰어난 두목 小人之雄’ 간웅다웠다.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리던 날도 ‘심히 탄식하였다.’5) 그러나 조광조 등에게 사율을 적용하겠다는 초지(初志)를 바꾼 적이 없었다. 다만 삼의정(三議政)을 비롯한 대소 신료가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과격한 언론’일 뿐이라며 반대하고, 어전의 사관(史官)은 연유를 알 수 없으니 시정기(時政記)를 작성할 수 없다, 이백여 명 성균관 유생이 궁궐까지 난입하여 ‘같이 죽겠다’, 통곡하자 일단 물러섰을 따름이다. 더구나 임금은 한강을 건네는 이들에게 유시하였다.6)

“그대들의 죄를 형률대로 결단하였다면 이런 정도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심이 없었고 다만 나랏일을 한다며 과격한 줄을 몰랐던 것이니 가볍게 죄를 주는 것이다. 여느 죄수라면 이런 분부도 하지 않을 것이며, 내 어찌 오래 시종하던 그대들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이것은 연막이었고 속임이었다. 이날의 사평도 다음과 같다. “임금이 당초에 매우 엄하게 가두고 다스렸으나 분부가 자못 부드러워 모두들 행여 다시 심의하여 죄를 용서할지 모른다고 하였는데 끝내 그렇지 않았다.”

이러한 배후에 남곤이 있었다. 남곤은 윗대가 문과 급제자가 없는 포의 집안 출신이지만 화려한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평소 감춤이 깊었다. 훗날까지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싶었던지 자신의 글을 전부 불태워 없애라고 하였다. 오직 「유자광전(柳子光傳)」이 전하는데, ‘비록 세세하고 촘촘하지만, 소인이라야 능히 소인의 정상을 안다는 것이 참으로 거짓말이 아니다’는 빈정거림을 받고 있다. 그런데 심연 같은 감춤을 어렴풋 짐작한 선배학인이 있었으니, 나주 금성 출신으로 해남으로 장가들어 살았대서 ‘금남(錦南)선생’으로 존중받았던 최부(崔溥)였다. 연산군 치세 사간원 사간으로 봉직하며 후배 정언 정광필ㆍ남곤과 시를 주고받았는데, 다음 구절을 건넸다고 한다.7) “훗날 사람들이 우리 시축을 가리키며 어루만질 적에, 누가 간사하고 누가 충성되다 할는지 모르겠노라.”

최부(1454∼1504)는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이라는 이유로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를 갔다가 갑자사화 때 참형을 당하였는데, 일찍이 성균관 시절 김굉필 등과 ‘정지교부계(情志交孚契)’를 꾸렸었다. 『신편동국통감』의 많은 ‘신(新)사론’을 집필하고 『동국여지승람』 수정증보에 참여하였으며 제주도경차관으로 갔다가 부친상을 당하자 급히 나오며 절강 영파까지 표류하여 북경을 거쳐 귀국한 여정을 담은 『표해록』으로 유명하다.

1514년 별시 문과에 급제한 남주(南趎) 또한 남곤의 심사, 처신을 꿰뚫고 있었다. 남주를 끌어들이려고 초청한 자리에서 등 굽은 소나무 분재(盆栽)에 견주며 비꼬았다.8)

 
한 그루 화분에 꽂힌 줄기는 약해도, 一朶盆莖弱
자태는 씩씩하여 천추의 눈발을 견딜 만하군. 千秋雪態豪
누가 너의 굽은 등을 펴줘서, 誰能伸汝曲
곧추 올라 높은 저문 구름을 헤집게 할까? 直拂暮雲高
 

이 때문에 남곤의 분노를 샀던 남주는 성균관 전적 이상의 벼슬을 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향 곡성에서도 살지 못하고 장성 삼계로 옮겼다가 28살에 죽었다.

남곤은 조광조ㆍ김식과도 일찍부터 악연이 있었다. 반정 몇 달 후 일어난 ‘박경ㆍ김공저 옥사’ 때였다. 김공저(金公著)는 의술로 지중추부사까지 오른 당대 국의였고, 박경(朴耕)은 서얼 출신 명필로 김일손이 일찍이 ‘국가의 풍속이 사람의 재능을 숭상하지 않고 국법에 구애되어 글씨로 먹고 살아갈 뿐이지 그 뜻은 글씨에 있지 않은 잠부’로 평가한 바 있었는데, 왕가와 불가의 추문을 고발하는 대자보를 김일손에게 건넸대서 무오사화 때 국문을 받기도 하였다.9) 이러한 두 사람이 박원종과 유자광이 퇴진하면 조정이 맑아질 것이라는 뜻을 주고받으며 평소 왕래가 있던 당시 병조판서 김감(金勘), 대사헌 이계맹(李繼孟), 공조참의 유숭조(柳崇祖) 등에게 세간의 인심을 전달하였다. 즉 신왕의 등극에 환호하던 인심이 지금 청탁과 뇌물로 많은 공신을 양산한 때문에 나라가 병들었다고 걱정하고 있으며, 왕실의 지친이라는 이유로 오랜 동안 호사를 누리다가 폐주가 일시 배척하였다고 반정을 단행한 한낱 무부 출신 박원종의 심사가 종내 어디를 향할 것이며, 이시애의 난 때 ‘적개(敵愾)’, 남이의 옥사로 ‘익대(翊戴)’에 더하여, 반정으로 ‘정국(靖國)’의 공훈 보탠 유자광이 ‘폐주를 부추겨 많은 선비를 죽였던’ 사단을 또 다시 일으키지 않겠는가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여론을 모르지 않았던 김감ㆍ이계맹 등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오히려 이들의 신변을 걱정하여 입단속을 시켰다. 그런데 심정에게서 박경ㆍ김공저의 대화 내용을 전해 들었던 남곤은 달랐다. 심정을 통하여 박경 주변의 인맥이나 정황을 파악한 다음, 유숭조로 하여금 그간 김공저와의 대화를 탑전에서 아뢰도록 하고, 자신은 상중이라 임금을 직접 알현할 수 없는 관계로 소복에 갓을 쓰고 승정원을 찾아가 고발하였다. 이때 조광조와 김식도 국청에 끌려갔다. 이들은 박경에게 들은 이야기를 공술하였다. 대강 ‘선비라면 성리학을 공부해야 한다.’ ‘과거제만을 통한 인재 선발은 옳지 않으며 인재를 발탁할 때에도 품계에 너무 얽매여서는 아니 된다.’ ‘현명한 종친을 등용하고 서얼을 허통해야 한다.’ 기묘정치의 밑그림이었다.

조광조와 김식은 국청을 나오면서 어떤 심정이었을까? 연산군의 옛 나인까지 들인 질퍽한 연회를 즐기며 권세와 탐욕의 늪에 빠진 박원종과 이름 석 자만으로도 끝 모를 음모의 공포를 자아내는 유자광이 퇴진하면 바른 조정 편안한 나라가 열리리라는 소망을 대신을 암살하고 조정을 전복하려고 하였다는 역모사건으로 꾸며낸 남곤, 그리고 심정은 도대체 누구인가? 하였음이 틀림없다. 이때 조광조ㆍ김식은 26살, 남곤ㆍ심정은 37살이었다. 착한 사람은 속임의 깊이를 알지 못하고, 숨김없는 사람에게 감춤의 색깔이 보이지 않음일까? 십여 년 후, 국왕의 신임 지우만을 알다가 깊이 없는 속임, 색깔 없는 감춤에 그만 박상의 말대로 틈새를 보이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남곤ㆍ심정의 모략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1521년 가을 안처겸(安處謙)이 이웃 살던 종친 이정숙(李正淑) 등을 만나 시국에 대한 울분을 토로하였을 때였다. ‘죄도 없이 죄를 받은 사림이 많으니 앞으로 남아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또한 ‘남곤과 심정이 권력을 농단하며 임금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다.’ 또한 ‘경명군ㆍ영산군도 걱정이 많다.’ 경명군과 영산군은 중종의 열째ㆍ열세 번째 왕자, 안처겸은 조광조 등의 진출과 활동을 뒷받침하였던 우의정 안당의 아들로 현량과로 출신하였으며, 이정숙은 중종에게 이정(二程)의 학문을 소개하는 등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종친으로 신씨복위소를 올린 박상 등을 죄줄 수 없다는 등의 정견을 개진하였었다.

이들의 대화에 송사련(宋祀連)도 끼어있었다. 송사련(宋祀連)은 안당의 서얼누이의 아들이지만 안당은 친조카로 보살피고 안처겸 또한 친사촌처럼 친밀하게 여겼다. 그런데 송사련은 아니었다. 속량이 되지 않는 한 ‘어미가 천민이면 아비가 양인이라도 소생은 천민이며 어미의 주인에게 귀속한다’는 노비종모법에 따라 천민이고 안씨가의 노복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송사련을 남곤과 심정이 속량(贖良)과 관작으로 끌어들이고선 안처겸 등의 비분강개를 ‘대신 암살과 경명군 추대 역모’로 조작하였다. 이때 안당의 부인 초상 때의 조문록(弔問錄)과 발인 때의 역군부(役軍簿)는 공모자와 암살단의 명부가 되어 많은 사람이 형문을 받고 귀양 갔다. 안처겸 삼형제와 같이 현령과에 급제한 신잠, 성균관 유생 시절 정몽주를 처음 문묘에 종사하자고 건의하였던 권전(權磌), 문과 제술에서 신씨복위소를 지지하였던 이충건(李忠楗), 조광조 구속을 반대하며 성균관 유생 상소의 소두로 활약하였던 이약수(李若水) 등이 형장을 맞고 죽었다. 안처겸의 부친 안당 또한 교사(絞死)되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제주의 김정, 함경도 온성의 기준도 사약을 받았으며, 조광조의 능주 귀양길을 금강에서 송별하였던 전 충청수사 한충(韓忠)은 유배지 거제에서 끌려왔다가 무죄 방면이 결정되었던 그날 밤 누군가에 의해 목 졸려 죽었는데 남곤이 시킨 일이었다. 한충(1486∼1521)은 청주 태어난 마을에 밤나무를 많이 심어가며 소나무 세 그루 아래 삼송정(三松亭)에서 공부하고 1513년 별시문과에 장원하였는데, 1518년 가을 태조 이성계가 고려 권신 이인임의 아들로 기록된 『대명회전(大明會典)』의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한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가서 예부에 십여 차례 자문을 올려서 시정 약속을 받아낸 적이 있었다. 당시 정사는 병이 들어 위태하였고 부사는 정사의 병구완이 더 급했다. 그런데 한충이 부사에게 ‘저 사람은 반드시 사림의 피를 볼 것이요’ 하였는데, 그만 정사가 들었다. 남곤이 바로 그 정사였다.

 
1) 『정암집』 속집 권1, 「綾城累囚中」
2) 『눌재집』 속집 권2, 「逢孝直喪」 “無等山前曾把手 牛車草草故鄕歸 他年地下相逢處 莫說人間萬事非”
3) 『목은문고』 제5권 「석서정기(石犀亭記)」
4) 『연려실기술』 제8권, 「金湜의 亡命獄」; 『눌재집』 부록 권2, 「서술」
5) 『중종실록』 37권, 14년(1519) 12월 16일.
6) 중종실록 37권, 중종 14년 11월 17일
7) 朴東亮, 『寄齋雜記』 1, “後人指點摩挲處 不知某也回某也忠” 박동량은 성종 치세라고 하는데, 사간원에 같이 봉직한 때는 연산군 2년이었다.
8) 『연려실기술』 제8권, 「기묘당적」 ‘남주(南趎)’
9) 『연산군일기』 30권, 4년 7월 12일; 김일손, 『濯纓集』 권1, 「박눌의 글씨에 대한 사호의 발문 다음에 적다 題士浩跋朴訥書後」. 사호는 강혼(姜渾), 박눌은 박경의 아들이다.

글쓴이 이종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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