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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초상]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왕재일과 아버지 왕경환 게시기간 : 2020-06-18 07:00부터 2030-12-16 21:21까지 등록일 : 2020-06-11 11:23

조회수 :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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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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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초상 여섯번째 이야기2020년 6월 18일
여섯번째 이야기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왕재일과 아버지 왕경환

「광주 감옥에 있는 재일에게 부치는 글」 1931년 10월 17일

 

꿈에 네가 만신창이가 된 것을 보았단다. 꿈에 보니 네가 파리하게 병들어 누워 있더라. 어쩌면 간절한 나의 생각이 꿈이 된 것일까? 아니면 너의 실경(實景)이 나에게 보인 것일까? 네가 수감된 지 이제 3년이 되었으니 어찌 기한(飢寒)과 더위(暑潦)에 손상이 없기를 바랄 수가 있겠으며 여타의 곤고(困苦)에 대한 근심이 없겠느냐? 이것 때문에 허구한 날 편지가 없느냐? 아니라면 편지를 금하기 때문에 부득이 편지를 못하는 것이냐?

 

  寄在一光州監獄書         辛未 十月 十七日

   夢見汝滿身瘡痍 夢見汝疲然臥病 豈我思之切而夢以之爲耶. 抑汝實景形見於我耶. 蓋汝被監以來 三年于玆 那望無損於飢寒暑潦憂思困苦之餘耶. 豈其因是而許久無書耶 抑爲被禁而不得頻書耶.1)

 

지금 광주 감옥에 수감되어 영어(囹圄)의 삶을 살고 있는 젊은이는 왕재일(王在一)이다. 이 글은 감옥의 아들이 걱정되어 쓴 아버지 왕경환(王京煥)의 간찰이다.

왕재일은 1926년 장재성과 함께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한 이, 따라서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이었다. 왕재일은 1904년 구례에서 태어났고, 광의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광주 숭일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중퇴하였다. 흥학관에서 기숙하면서 공부하여, 뒤늦게 광주고보(광주일고의 전신)에 들어갔다.

감옥에 있는 아들에게 편지를 보낸 부친 왕경환은 호가 옥천(玉川)이다. 옥천은 1873년 2월 3일 태어났다. 한시에 해박했다. 독실한 불교 신자여서 늘 금강경을 외웠다. 옥천은 전국의 사찰을 순례하면서 산천을 찾아 노닐기를 좋아했다.

그는 일제시대 大正이나 昭和와 같은 왜의 연호를 안 쓰고 檀紀를 썼다. 「天祖開國四千二百五十八年乙丑九月以後」처럼 옥천은 글에 단기를 썼다. 옥천은 또한 국문을 사랑하였다. “글은 국문이 제일이다. 말도 국문으로 만들어 쓰고 글도 국문으로 만들어 써 보아라. 국문은 참 좋은 글이다. 편하고 못할 말이 없다.”2)고 말하였다.

“어느 날, 섬진강가에서 아이들이 고동을 잡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아이들이 잡은 고동을 돈을 주고 사서 고동을 다시 강바닥에 쏟아 풀어주었다.”3)며 왕재일의 부인 김현식 여사는 시아버지에 대한 일화를 들려주었다. 옥천은 평생 육식을 하지 않았고 새벽이면 일어나 독경을 했다.

옥천의 부친은 왕봉주(王鳳洲)인데, 매천(梅泉) 황현(黃玹)과 깊은 교유를 나누었다고 한다. 봉주공(鳳洲公)은 황매천의 스승이었다고 한다. 왕재일의 종조부 소천공(小天公) 역시 황매천과 친밀한 사이였는데, 그의《소천매천집》에는 매천에 바치는 여러 수의 시가 담겨 있다.

왕재일의 투철한 민족의식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민족애에 그 맥을 잇고 있었고, 지리산 연곡사에서 최후를 맞이한 녹천 고광순의 의기, 황현의 절개로부터 자라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왕재일은 1926년 11월에 성진회를 조직하였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5년부터 싹트고 있었다. 일제의 그릇된 기만교육에 항거하는 맹휴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런 가운데에 광주고보생 왕재일과 농업학교생 신수용, 정동수 씨 등이 동지 규합에 나서게 되었다. 성진회란 명칭은 왕재일의 제의에 따라 회원 모두가 동의함으로써 결정될 수 있었다고 한다.

1927년 3월 왕재일은 광주고보를 졸업하고, 농촌계몽에 뜻을 두고 강진으로 내려갔다. 1927년 10월 강진읍 윤엽(尹燁)자동차부에 사무실을 두고 동아일보사 강진 지국을 개설했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성진회의 조직자였던 왕재일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으로 지목되어 광주와 목포, 대구 감옥에서 1년 6개월을 복역했다.

1931년 출옥한 왕재일은 고향으로 돌아가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한가롭게 지낼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그는 농민들이 주동이 된 항일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을 결의하였다. 전라남도 서남지역을 두루 살펴본 뒤 완도의 이기홍, 문승수, 전홍남, 장흥의 유재성, 전기주, 김술삼, 길인주 해남의 박병선, 강무수 등을 만났다. 그즈음 전라도 각지에서 광주학생운동의 동지들과 후배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이듬해 1932년 2월에 전라남도 장흥군을 근거지로 하여 전남농민협의회를 조직하였다. 각종 야학회와 소작쟁의를 이끌면서 농민의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5년 11월경 농민회사건이 발생하여 1936년 12월까지 558명이 검거되었고 57명이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으로 송국되었다. 왕재일은 1935년 12월 피체되어 1936년 1월 목포형무소로 이감되었고, 1937년 7월 대구복심법원에서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왕재일의 족적을 따라가 보면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일으킨 광주의 학생들은 출옥을 하고도 독립운동을 지속해나갔음을 알 수 있다. 서울 지역에서 활동하던 젊은 운동가들이 영등포와 인천 등지의 공장 노동자들을 조직해나갔던 반면, 전남 지역에서 활동하는 젊은 운동가들은 강진과 장흥, 완도와 해남 등지에서 농민들을 조직해 나갔던 것이다. 전자가 이재유와 이관술이 이끈 경성 ‘콤그룹운동’으로 기록되었다면, 후자는 김보섭과 황동윤이 이끈 ‘전남사회운동자협회운동’으로 기록되었다. 성진회의 주역 왕재일과 최규창, 그리고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퇴학을 당한 이기홍은 이후 1930년대 초반 농촌 현장에서 독립운동의 씨를 뿌리고 있었다.

 

그런데 왕재일은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는 위인이었다. 고대하던 8·15 해방을 맞았으나 남들처럼 “내가 항일투사네” 하고 말 한 번 하지 않고 조용히 신문기자가 되었다. 때로는 그의 덕으로 취직이 되는 이들이 감사의 뜻으로 쌀가마니를 보내오는 일이 있었으나, 왕 씨는 가지고 온 쌀을 되돌려 보냈다.

왕 씨의 부인 김현식 여사는 왕 씨와 결혼한 뒤 갖은 고생을 다했다. 김 여사는 광주 무등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했다. 등에 지고 온 나무는 때고, 머리에 이고 온 나무는 팔아서 죽거리라도 마련해야 했다. 꽁보리밥으로 한 끼를 먹으면 그 날은 잘 먹는 날이었다. 하지만 길에서 걸인들을 만나면 집으로 데려와서 때를 씻겨주고 입혀 주고 먹여 주고 또 직장을 알선해 주었다.

왕 씨는 자식들에게 이르기를 비록 가난하게 살아도 물질에 욕심을 내지 말고 착한 일을 많이 하라고 일렀다. 어느 날 신문기자들과 나눈 환담에서 “사람은 성실하게 살면 외롭지 않습니다. 배가 고프다고 해서 거짓말은 하면 안 됩니다.”4)라고 말했다.

왕 씨는 일제 때 출옥 후 34차례나 끌려가서 갖은 고문과 수모를 당하였다. 일경에게 끌려가면 몽둥이이질을 당하여 그의 몸은 퍼런 멍이 가실 때가 없었다. 날이 흐리면 심하게 맞은 부위가 아파서 고통을 많이 받았다.

1959년 10월에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제로 한 영화 「이름 없는 별들」의 제작 기념을 위한 동지회 모임이 있었는데 그날 왕재일 씨는 마실 줄 모르는 술을 많이 마시고 와병했다. 가뜩이나 일경의 고문에 의한 여독이 심한데다가 영양도 제대로 취하지 못한 몸이었다. 1961년 2월 14일 새벽 3시에 광주시 산수동 오막살이 토담집에서 영면했다.

호남신문 1961년 2월 14일자는 이렇게 기사를 보도했다. “이 고장에 또 하나의 큰 별이 소리 없이 졌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횃불이 되어 일제의 폭정에 머리를 곤두박 치던 항일투사 왕재일 선생 … 13일 밤 새벽 1시경 향년 57세를 일기로 마지막 숨을 거뒀다. 시내 산수동 높다란 언덕 위 조그마한 흙담집 안에서는 슬픈 호곡 소리가 찬바람에 물결쳤다. 조객이라고는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은 14일 아침, 철없는 어린애들은 영문을 모르고 노래를 부르고 찾아온 기자의 얼굴을 말끔히 쳐다보았다. “3개월 전부터 밥 한 술 제대로 못 뜨셨어요 …그런다고 이렇게 갑작스레 돌아가실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

 

옥중에 있던 아들 재일에게 보낸 아버지의 애틋한 한시 한 수를 살펴보자. 아버지의 한시는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수난을 표현한 시문학일 것이다.

 

대구 옥중에 있는 재일을 그리며

 
二年未一面 2년에 한 번도 못 만나니
方識獄門深 바야흐로 옥문이 깊은 것을 알겠노라
縲紲定非罪 포승줄에 묶인 것은 정히 죄가 아니거늘
思望幾費吟 그리운 마음으로 얼마나 시를 읊조렸나
 
汝須歸奉養 네가 모름지기 돌아와 봉양할 때면
吾已老浸尋 나에겐 이미 늙음이 침범해있겠지
日暮浮雲遠 날은 저물고 뜬구름 흘러가니
悠悠寄此心 아득히 이 마음 기탁하노라5)
 
1) 《항일투쟁가 왕재일의 생애와 사상》, 동아출판사. 1985. 95-6.
2) 같은 책, 23.
3) 같은 책, 78.
4) 전남일보, 1961년 2월 15일자 3면
5) 《항일투쟁가 왕재일의 생애와 사상》, 84.

글쓴이 황광우 작가
(사)인문연구원 동고송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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