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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학산책

[풍경의 기억] 6·25 전쟁 70주년에 돌아보는 자은도(慈恩島)의 붉은 3개월 게시기간 : 2020-06-13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0-06-11 10:12

조회수 :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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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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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기억 열여섯 번째 이야기2020년 6월 13일
열여섯 번째 이야기
   

6·25 전쟁 70주년에 돌아보는 자은도(慈恩島)의 붉은 3개월

 

올해로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정부에서는 “함께 지켜낸 70년, 함께 만들어갈 한반도 평화”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고, 국방부에서는 참전용사의 헌신과 희생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한반도 평화와 번영에 대한 국내외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기억의 불꽃!”, “평화와 번영의 횃불로!” 를 슬로건으로 하여 기념사업을 추진 중이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전장터에서 목숨 바친 호국 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는 뜻깊은 달이 바로 지금이다.

아직도 진행 중이긴 하나, 이번에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뜻밖에도 우리나라의 위상이 놀랄 만큼 높아졌음을 본다. 불과 70년 전,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 때를 돌이켜 보면 상전벽해도 이런 상전벽해가 없을 듯하다. 정말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여전히 살아 있는 6·25전쟁

남북분단과 이산가족, 실향민 문제 등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남아 있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6·25전쟁은 이제 역사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6·25의 상처들이 치유되었다기보다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냥 사라진 듯하다. 그렇다고 아주 사라진 것은 물론 아니고, 또 역사로만 남겨둘 수도 없다. 연평해전, 천안함 침몰사건 등 지금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군사적 충돌, 그리고 북한의 핵개발 등으로 인하여 6·25전쟁은 정전(停戰), 즉 잠시 중단된 전쟁임을 상기시키곤 한다. 전시작전권 환수나 평화협정의 체결 등 넘어야 할 산들이 남아있는 것이 여전한 현실이다. 6·25전쟁의 상처는 이렇게 살아 우리의 현대사를 옥죄고 있다.

구소련비밀외교문서 등을 통해 6·25전쟁은 소련의 지원과 중국의 동의를 얻은 북한의 철저한 기획에 의한 전쟁이었음이 확실해지면서 전쟁을 누가 일으켰는가에 대한 오랜 논란은 종지부를 찍었다. 하지만 지난 정부 때 중학생들이 남침이냐 북침이냐를 헷갈려 한다면서 역사교육 강화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계기가 되었고 급기야는 역사교과서 국정화까지 비화되었다가 오히려 대통령 탄핵의 빌미가 되는 등, 6·25전쟁의 역사는 이렇게 여전히 살아 있다.

 

무엇을 기억해야 하나?

3년간 지속된 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전선에 섰던 군인들뿐만 아니라 국민보도연맹사건을 위시하여 예방·보복 학살로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 130만 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남북한 전체 인구대비 10%에 이르는 약 290〜369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UN군과 중국군 등 외국인까지 합하면 사망자 150만 명을 포함해 사상자 수가 약 5백만에 이른다.

1948년 4·3사건 때 당시 제주도 인구 30만 가운데 2만 5천 내지 3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희생되는 엄청난 참극이 발생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1999년 12월, ‘제주4·3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을위한특별법’이 제정되어 진상조사에 들어갔고, 그 결과 4·3사건은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국가권력에 의한 대규모 희생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인정하고, 정부에서는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였다. 여수시에 주둔 중이었던 14연대 소속 군인들이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한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무장반란과 여기에 호응한 좌익계열 시민들의 봉기가 유혈 진압된 여순사건에서도 무고한 민간인들의 희생이 따랐다. 이런 일련의 비극적인 사건들이 6·25전쟁 전후 일어났다.

이런 비극은 전남의 여러 섬들에서도 일어났다. 진도군 의신면 구자도리의 갈매기섬[갈명도]에서도 1950년 여름 무참히 살해된 시신들의 흰옷으로 백색 천지였다고 전해진다. 갈매기섬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해남 보도연맹원들이었다. 1949년 6월 조직된 보도연맹은 좌익전향자를 계도할 목적으로 정부가 만든 것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북한군에게 이적행위를 할지도 모른다는 가정 하에 정부는 이들을 모두 학살하라고 지시했다. 비극의 악순환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북한군이 진주하자 유가족들은 복수에 나섰고, 9·28 수복 이후 군경들은 또다시 재차 복수에 나섰다. 이 와중에 전남은 남북·좌우를 통틀어 가장 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한 곳이 되었다.1)

70주년을 맞으며 전남의 상처는 유독 커 보인다. 그 상처는 지역공동체 내의 삶이 붕괴되는 데서 더 큰 아픔을 남겼다. 이런 비극은 신안군 자은도에서도 일어났다. 그 역사적 연원을 찾아 올라가면 매우 깊다. 여기서는 이를 따라가며 살펴보기로 하자.2)

 

지도교안(智島敎案)

그 연원을 찾아 올라가면 1901년 ‘지도교안’에 닿는다. 자은도가 이른바 ‘지도교안’의 주무대가 되었었다. 지도군(智島郡)이 1896년에 신설되었기 때문에 자은도 등을 포함한 섬 지역의 사건에 ‘지도’라는 군의 명칭이 붙었다. ‘교안(敎案)’은 천주교회가 1866년 포교의 자유를 획득한 이후 교세가 확장되는 가운데, 제주도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발생한 천주교민과 지방관리·토착주민 사이에 일어났던 분쟁 사건들을 말한다.

‘지도교안’은 1901년 7월 자은도의 천주교민 중 9명이 지도군에서 관속 10여 명에게 구타당하는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지도군 섬들의 토지에 대하여 관속 및 각종 방면의 수탈이 매우 심하였다. 이에 따라 교민들에 의한 조세 납부 거부 사례가 상당수 일어났다. ‘지도교안’은 천주교회가 나서 섬 주민들과 함께 지방관을 배척하였던 전형적인 사례였다.

자은도는 여타 다른 섬들에 비해 비교적 일찍 천주교를 접했다. ‘지도교안’이 일어나던 1901년에 예비신자가 150명이나 되어 다른 지역에 비해 두드러졌다. 신자 및 예비신자의 증가는 순수한 신앙심보다는 천주교회의 세력에 의탁하여 보호받으려는 의도가 더 많이 작용하였다. 이런 교세 확대를 배경으로 1900년 이후부터 교민들은 집단적인 납세 거부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앞장선 곳이 자은도였다. 그러나 천주교회의 힘에 의존한 측면이 컸기 때문에 정세의 변화에 따라 교안의 결과는 오락가락했다. 오히려 교안 발생 이후 관속들과 두민배의 수탈은 더욱 가중되었다. 이 와중에서 섬주민들간의 갈등은 커졌고 또 관과의 대립도 불거졌다. 자은도는 ‘지도교안’의 발상지였기 때문에 어느 곳보다 심한 시련을 겪었다. 20세기 최초의 시련이었다. 그러나 자은도는 앞으로도 더 크고 어려운 시련을 앞두고 있었다. 교안은 다만 시작일 뿐이었다.

 

소작쟁의

1923년 8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1년에 걸쳐서 전개된 암태도 소작쟁의는 섬은 물론이거니와 당시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았던 대표적인 소작쟁의였다. 그런데 당시 소작쟁의는, 그 시작도 그랬고 끝도 그랬지만, 암태도만으로 시작하지도 암태도만으로 끝나지도 않았다.

암태도 소작쟁의가 어렵사리 마무리된 직후인 1924년 9월 21일, 자은 소작인회는 자은 청년회관에서 제3회 임시총회(임시의장 송기화)를 열어 4할의 소작료와 불납동맹을 결의하였다. 이에 지주측과 소작료율에 대하여 협의하여 답 4할, 전 3할로 협정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925년 8월에 지주들은 협정을 무시하고, 다도농담회(多島農談會)라는 지주회를 조직하여 소작료를 5할로 하기로 선언하였다.

이에 자은 소작회에서는 9월 중에 총회를 열어 협정 준수를 요구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 소작료 불납동맹을 결행하기로 농담회에 통지하였다. 이처럼 소작인회는 4할제 및 불납동맹의 결의를 여러 차례 반복하면서 결의를 다져나갔다. 소작인들이 4할을 수용하지 않는 지주들의 소작료를 지정한 장소에 모아 두고 버티던 중, 지주측에서 집달리와 농담회 간사 등을 보내 가산을 가차압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농민들은 실력행사로 차압을 방해하고 나섰다. 이렇게 자은도의 소작쟁의는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이 혼란은 해를 넘겼다.

자은도 소작쟁의는 어느 쟁의보다 조직화의 진행선상에서 일어났다. 무안군 내의 조직적 지원과 연대, 그리고 전국적 지원의 확대로 이어지면서 자은 소작쟁의는 점차 지역의 외연을 넓혀 제2의 암태도 소작쟁의로 커질 조짐을 보였다. 그러자 뜻밖에도 그 쟁의는 신속하게 처리되고 말았다. 쟁의로 인한 충돌이 일어난 지 한 달만인 1월 30일, 지주와 소작인대표가 회합하고 군수·서장·면장이 여기에 입회하여 협정서를 작성함으로써 해결되어 버렸다. 이렇게 소작쟁의는 끝이 났다. 대충돌의 과정을 거치면서 마냥 지속될 것만 같던 쟁의가 어느 한순간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이는 암태도의 경험 때문에 확산을 원치 않던 일제측이 적극적으로 지주측을 압박한 결과로 보인다.

물론 소작쟁의가 타협점을 찾아 해결되었다고 해서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 사람들의 마음속에 난 상처는 치유가 쉽지 않았다. 오히려 불거지는 측면이 컸다. 아닌 게 아니라 한 해가 다 지나지 못해 자은도에서는 또다시 소작인이 구류처분을 당하는 일이 생겼다. 이로 인하여 자은면 소작인들은 다시 불안한 기운에 싸이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소작인에 반대했던 사람들과의 간격은 더 넓어졌다. 이는 그만큼 섬주민들이 지주 편과 소작인 편으로 나뉘어 양자간에 갈등의 골이 깊어져 갔음을 뜻하였다.

이렇듯 소작쟁의 당시 사람들간의 감정에 남은 앙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이 때문에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하곤 하였다. 그만큼 자은도 주민들은 시련과 더불어 갈등을 쌓아갈 수밖에 없었다.

 

붉은 3개월

그런 갈등의 여파는 한국전쟁 당시 “붉은 3개월” 동안 처절하게 나타났다. 이는 인근의 암태도도 마찬가지였다. 자은도는 6·25 전쟁 기간 서해안의 섬들 중에서 임자도, 지도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양민들이 죽음을 당한 곳이었다. “쓴물 든물에 희생자가 2천 명”이라는 말처럼 학살은 좌우 양편에 의해서 모두 저질러졌다. 자은도에 사는 어르신들이 말을 꺼내기 싫어하면서도 대개 일치하는 부분을 보면, 북한군 점령 당시에 저질러진 학살은 “넘의 집 사는 사람들”이 시작했는데 이들은 그 연원이 소작쟁의 당시 소작인에 닿아 있는 이른바 좌파 계열의 사람들이었다. 이미 1947년 5월과 1948년 3월에 남로당원들에 의한 폭동을 의심케 하는 사건들이 일어났었다. 한편 국군이 수복한 후에는 우익 계열의 사람들에 의해 다시 학살이 행해졌다. 이는 주로 좌파에 대한 보복이었다. “붉은 3개월” 동안 이렇듯 양민학살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때 서로 죽이고 죽은 사람들은 함께 조그마한 섬을 지키며 모진 세월을 같이 했던 한 동네 사람들이었다. 무엇이 그들을 이처럼 죽이고 죽는 시련의 시험에 들게 하였는지?

 

화해를 위한 노력

20세기의 시련이 주민들간에 갈등을 낳았고 이는 붉은 3개월이란 잊지 못할 상처로 남았다. 자은 사람들은 갈등을 넘어서는 화해를 통해 상처를 씻기 위한 많은 노력들을 거듭했다. 그들은 분노라는 감정의 다스림을 중시했다. 그리하여 갈등을 품은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귀의했다. 기독교는 그 화해를 위해 큰 몫을 담당했다. 성결교회로 통일된 8개의 교회가 그런 화해의 결과를 말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1997년 2월 17일, 암태도에 「암태도소작인항쟁기념탑」이 들어섰다. 그 탑은 시련을 겪었던 자들의 해원을 담은 탑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탑은 자은도에겐 오히려 지난 시련의 고통을 되새기게 하는 또 다른 아픔이 되었다. 자은 사람들의 이런 아픔을 담아주려는 듯 3년 후인 2000년 1월 1일, 자은도에는 기념탑 대신 「충혼탑」이 세워졌다. 그리고 그들은 이 탑을 화해의 상징으로 여겼다. 이 충혼탑은 그래서 그런지 유난히 「암태도소작인항쟁기념탑」을 닮았다. 그러나 탑 어디를 둘러봐도 이 탑을 왜 세웠는지를 알리는 탑명은 없다. 쓰레기장 위에 세워진 말끔한 충혼탑, 화해를 위한다는 이 탑, 그러나 여전히 이 충혼탑만으로는 자은 사람들의 마음속 빈자리를 채워주지는 못하는 듯하다.

6·25전쟁이 일어난 지 70년이란 긴 시간이 흘렀다. 이제 전쟁이 남긴 아픈 유산들을 미래지향적으로 현명하게 해결해야 할 때이다. 지금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림1

【그림1】 암태도소작인항쟁기념탑(1998년). 기념탑에는 소작인 항쟁사와 항쟁에 참여했던 농민 43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림2

【그림2】 자은중학교 앞에 세워진 충혼탑. 2000년 1월 1일 준공.

그림3

【그림3】 제주 4·3 평화공원 내 「4·3 70주년 추모 동백꽃」 조형물. 붉은 동백꽃은 4·3으로 희생된 수많은 영혼들을 상징한다.
4·3의 슬픈 역사가 평화와 생명의 소중함으로 온누리에 퍼지길 기원하며 세웠다.

그림4

【그림4】 주민들간의 상처를 달래며 화해의 장을 만드는데 역할하였던 성결교회 중 자은제일교회의 교회연혁이다.
문준경 전도사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1) 『한국전쟁기 전남지방 '민간인 희생'에 관한 재조명』(제12회 역사학전공 학술심포지움, 목포대학교 역사문화학부, 2003년 10월 30일) 참조.
2) 이에 대하여는 고석규, 「20세기 慈恩島의 시련과 화해」(『島嶼文化』21,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소, 2003) 참조.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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