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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와 옛편지] 기운생동, 연암의 글씨 게시기간 : 2020-06-11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0-06-10 14:16

조회수 :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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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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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와 옛편지 스물일곱 번째 이야기 번째 이야기2020년 6월 11일
스물일곱 번째 이야기
   

기운생동, 연암의 글씨

 

<기운생동>

 

‘기운생동(氣韻生動)’이라는 말은 기운이 충일하고 리듬이 있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그림에 대한 감상을 표현할 때에 쓰는 용어이다. 이 말은 그대로 글씨에도 적용할 수 있다. 조선후기의 대문장가 연암 박지원의 편지 글씨에서 그러한 느낌을 받는다. 연암은 문장뿐만이 아니라 글씨도 매우 뛰어난 필력을 보이고 있다. 간찰 글씨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생동감을 주는 글씨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족손(族孫)인 박남수(朴南壽, 1758~1787)가 당시 시중에 유행하던 윤상서체 편지 글씨를 보고서는 그 글씨가 비록 벼슬하는 사대부들의 모범이 되기는 하지만 대가의 필법은 아니라고 주의를 주었다. 문곡(文谷, 金壽恒)이나 용곡(龍谷, 尹汲)의 글씨가 우아하기는 하지만 풍골(風骨)이 전혀 없어서 대가의 필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림1

[그림1] 연암 박지원 초상(경기문화재단 소장)

 

그렇다면 연암은 어떤 글씨를 썼는가? 연암의 친필 글씨는 큰 글씨든 작은 글씨든 찾아보기가 무척 어렵다. 서울대 박물관에는 식민지 시기에 박영철(朴榮喆)이 수집하여 경성제대에 기증한 서화첩들이 있다. 그중에는 「연암선생 서간첩」이 있다. 이 서간첩에는 무려 30여 장이나 되는 연암의 간찰들이 오롯이 보관되어 있다. 몇 년 전에 한문학을 하는 동학들이 경쟁적으로 역주, 탈초본을 낸 바 있다.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박희병 역주, 2005년, 돌베개)라는 제목으로 나온 역주서가 있고, 또 「연암선생 서간첩」을 소개하고 역주, 탈초하여 학술지에 수록한 것(정민 역주, 2005년, 『대동한문학』)도 있다.

이 서간첩은 박지원이 60세 때인 안의 현감을 하던 시절부터 면천 군수를 할 때까지 아들 종의(宗儀, 1766~1815)와 처남 이재성(李在誠, 1751~1809), 지인인 개성 유수 황승원(黃昇源), 서산 군수 김희순(金羲淳), 저동(苧洞)에 사는 학사(學士) 등에게 보낸 간찰 30여 편을 장첩한 것이다. 이 간찰들을 통하여 우리는 연암 말년의 일상과 가정사, 문장 작법, 관료 생활 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연암집』이나 「열하일기」에서 볼 수 있는 연암의 글들이 정련되고 다듬어진 보석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이 서간첩은 다듬어지지 않은 살아있는 그대로의 연암의 모습과 글들이다. 서간첩을 번역하고 주석을 달고 탈초를 하여 소개한 책에서는 모두 역주본과 탈초본만을 소개하고 있어서 실제 연암이 썼던 글씨나 간찰의 형태를 볼 수가 없었다.

 

<아들에게 보낸 편지>

 

서간첩에 수록된 몇몇 간찰은 이미 다른 곳에도 공개되고 있다. 연암 간찰을 보고 느낀 첫 소감은 ‘기운생동!’ 바로 그것이었다. 이제 아래에 소개하는 연암의 간찰 2편을 통하여 연암의 글씨의 한 편린이라도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림2

[그림2] 박지원이 아들 종의에게 보낸 편지(국사편찬위원회 유리필름)

 

  [齋洞本家卽傳 燕巖行中平書]

  昨於留相之行 略寄/數字 已爲入覽否 吾無/恙老 兒亦平善 可幸 今/方燕岩 期欲於廿六七/間還歸耳 吏吏/必爲招致 言及此望日發/程可也 席奴亦不在/家 須善謹鎖鑰 戒飭/門戶等節如何 峽/行明當還來矣 不具

  丁巳(1797, 정조21)四月十八日 仲爺

 

  [재동 본가에 바로 전함/ 연암 여행 중의 안부 편지]

  어제 개성 유수의 행차에 대강 몇 자 편지를 부쳤는데 이미 들여다봤는지? 나는 아픈 데는 없고 아이도 평안하고 좋으니 다행이다. 지금 막 연암에 있는데 26, 27일간에 돌아갈 예정이다. 꼭 이조 서리를 초치하여 여기서 보름날 출발할 수 있다고 말해줘라. 석노도 집에 없으니 꼭 자물쇠 채우는 것을 잘 하고 여러 가지 문단속을 잘 하는 것이 어떻겠니? 골짜기에 들어갔다가 내일 돌아올 것이다. 이만 줄인다.

  정사년(1797, 정조21) 4월 18일 가운데 작은아버지

 

일필휘지로 쓴 글씨가 강약의 리듬이 있고 힘이 있으면서도 부드럽다. 마치 하나의 서예 작품을 보는 듯하다. 연암의 글씨에 대해서는 아들 종채(宗采, 1780~1835)가 『과정록(過庭錄)』에서 아버지의 글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아버지의 글씨는 필획이 굳세고 힘차서 기골이 우뚝한 안진경의 서체에다가 조맹부의 짙고 두터운 서체와 미불의 기이하고 가파른 서체를 보탠 듯했다. 빼어난 자태가 넘쳐흘렀지만 그 써내려가는 법도가 가지런하여 소해(小楷)의 세자(細字)로 쓴 시문의 초고들은 모두 서첩을 만들어 보배로 삼을 만했다. 그리고 행초(行草)로 쓴 큰 글씨는 붓자루 끝머리를 잡아 붓을 드리워 팔을 놀려 쓰신 것인데 농담이 잘 조화를 이루어 사람들이 모두 보배로 간직하였다.(『나의 아버지 박지원』, 돌베개, 1998년)

 

연암이 큰 글씨도 썼다고 했는데 지금 그런 글씨를 찾아볼 수는 없다. 횡액 대련(對聯)과 묵국(墨菊)이 각각 한 점씩 전해지지만 연암의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벽에 붙여두고 감상하기 위하여 쓰는 대련(對聯)과 같은 큰 글씨는 찾아볼 수가 없어 모르겠으나, 서간첩에 남아있는 행초(行草)의 편지 글씨는 다른 누구의 글씨보다도 활력이 넘치고 리듬감이 있고 자유분방하지만 그러면서도 짜임새가 있다. ‘기운생동’이라는 표현에 적합하다. 박종채는 아버지의 글씨가 안진경, 조맹부, 미불의 서체를 배워서 필획에 힘이 있고 기골이 있다고 평하였다.

이 편지는 연암이 안의 현감을 그만두고 서울에서 잠시 제용감 주부, 의금부 도사, 의릉령 등의 벼슬을 하다가 그만두고 개성 옆 금천의 연암 전장에 들어갔을 때에 서울의 큰아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피봉에 ‘재동 본가에 바로 전할 것. 연암에 여행 중에 보내는 안부 편지’라도 쓰고 있다. 편지 말미에 ‘정사년(1797, 정조21) 4월 18일에 가운데 작은아버지가’라고 쓰고 있는데, 사실 연암의 큰아들인 종의가 형인 희원(喜源)의 뒤를 잇게 되어 자신이 중부(仲父)가 된 것이다.

개성 유수인 친구 황승원(黃昇源)의 행차 편에 자신의 편지를 집에 보낸 것이다. 황승원은 20세 전후에 연암과 함께 산사에서 과거 시험공부를 같이 한 친구이다. 아들에게 이조(吏曹) 서리를 불러 자신이 서울에 돌아올 일정을 알리라고 한 것이다. 아직 면천 군수에 임명되지는 않았지만, 이조에 자신이 서울로 돌아오는 예정일을 알림으로서 부임 일정을 조정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집안일을 돌봐주는 석노라는 종이 없으니 집안 문단속을 잘 하라는 당부까지 하고 있다. 다른 일반 가장(家長)의 언행과 다를 바 없다.

 

<태지 또는 별지>

 

「연암선생 서간첩」에 수록된 30여 점의 간찰은 피봉이 없는 것, 발신인이나 발신 날짜가 없는 것들이 많이 있다. 피봉이 없어도 발신인이나 발신 날짜가 있으면 대강 그 편지의 수신자도 추측할 수가 있다. 그런데 발신인이나 발신 날짜도 없이 메모처럼 써놓은 간찰이 있다. 그 중에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나 처남 이재성에게 보내는 편지의 별지로 같이 발송이 되었기 때문에 피봉도 없고 발신인, 발신 날짜가 적혀있지 않은 것으로 추정이 된다.

간찰 본문에서 언급하기 어려운 사연들은 보통 태지(胎紙) 또는 협지(夾紙), 별지(別紙)라고 하여 편지 속에 같이 동봉하므로 수신인도 발신인도, 발신 날짜도 기록되지 않는 것이다. 서간첩에도 내용상으로 보면 처남인 이재성에게 전해져야 할 것 같은 별지, 아들에게 전해져야 할 것 같은 별지들이 소해(小楷) 글씨로 깨알 같이 쓴 것이 있다. 아래의 별지 간찰은 아들에게 보낸 간찰과 동봉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림3

[그림3] 박지원 간찰 별지(국사편찬위원회 유리필름)

 

연암의 작은 소해(小楷) 글씨는 해정(楷正)하고 깔끔하지만 그렇다고 사자관(寫字官)의 글씨처럼 무미건조한 것이 아니고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가 느껴지는 활달한 문인의 세자(細字) 글씨이다. 아들 종채가 평하였듯이 사람들이 보배로 간직할 만하다. 흐트러짐 없이 한 장의 별지에 가득 채워진 연암의 메모는 석치(石痴) 정철조(鄭喆祚)의 그림 두 첩, 나빙(羅聘)의 묵죽(墨竹)을 감상하며 그림이 작문의 요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가 하면, 합천 화양 땅에 선대 제사의 축문에 대해서 외삼촌과 같이 논의해보라는 것, 이덕무의 행장 짓는 문제, 관아의 업무를 보느라고 좋은 문장이 떠오르더라도 제대로 쓸 수가 없다는 것, 박제가가 가지고 있는 중국 시인들의 시첩을 빌려보라는 것, 함양의 의승(醫僧) 경암(敬菴)에 대한 관심 등을 전하며, 아들과 처남에게 요청하고 있다. 이중 이덕무의 행장 찬술에 관한 것과 박제가가 소장하고 있는 중국 시인들의 시고에 대한 부분만 본다면 다음과 같다.

 

  무관 이덕무(1741~1793)의 행장은 아직 글을 짓지 못하였다. 그의 잡록을 보면 모두 무관 글의 찌꺼기이고 하찮은 글이다. 별 볼일 없는 보통 이야기여서 보배로 삼기 부족하다. 대체로 그가 서얼이라는 것을 꺼려 숨기지 말아야지 비로소 글이 요령을 얻게 된다. 이 편지를 초정이나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어떠냐?

  懋官行狀 尙未及屬筆 觀其雜錄 皆懋官之粗魄/疎節 碌碌尋常 不足爲珍 大體不諱其爲一名 然後文/始得門路耳 此書示之楚亭諸人如何

 

  재선 박제가(1750~1805)가 가지고 있는 중국에서 온 지금 사람의 시 친필 몇 첩을 얻어 빌려본다면 이 며칠간의 조급증을 늦출 수가 있을 텐데 그 사람이 망상무도해서 어찌 그 지극한 보배를 잠시라도 손에서 내놓겠는가? 그래도 꼭 한번 빌려보아라.

  在先家所有東來今人詩筆數帖 如得借觀 當寬此數/日躁症 而其人也 罔狀無道 安能以至寶蹔時出手乎 第須借之

 

『연암집』에 수록되어 있지 않은 조선후기 북학파 연암 그룹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알려주는 자료이다. 앞 구절에서는 이덕무의 행장을 아직 쓰지 못했다고 하면서, 이덕무의 글이 하찮은 것에 불과한 것은 자신들이 서얼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말고 진솔하게 글을 써야 제대로 글을 쓰게 되는데, 그렇지 못하여 하찮은 글이나 쓰게 된다고 하면서 초정 박제가나 영재 유득공, 이희경과 같은 자신 문하의 서얼 그룹들에게 글 쓰는 요체를 충고하고 있다. 뒷 구절에서는 박제가 집에는 연행을 통해 가져온 당대 중국 시인들의 시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시첩 몇 개를 빌려보면 자신의 조급증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박제가를 도리가 없는 못된 놈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이 별지 간찰은 비록 아들 종의에게 쓴 것이지만 실제로는 처남인 이재성에게 부탁을 한 것이다. 박지원은 처남 이재성을 통하여 자신의 문도들인 이희경(李喜經)이나 박제가, 유득공 등에게 자신의 요구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박제가를 ‘망상무도’라고까지 하면서도 그들에게 이 편지를 보이라고 한 것은 그만큼 연암 문도들의 친밀감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것은 박제가가 상처(喪妻)를 하고 또 절친인 이덕무가 죽었을 때에 박제가는 이제 천하의 외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하면서 같이 슬퍼한 편지글에서도 느낄 수 있다.(『燕巖集』卷10 罨畫溪蒐逸 與人 安義時)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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