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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길을 열다] 우리 해동, 보우하사! 사산비명(四山碑銘) ② 게시기간 : 2019-10-01 07:00부터 2030-02-01 00:00까지 등록일 : 2019-09-30 11:18

조회수 :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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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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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길을열다 열두 번째 이야기2019년 10월 1일
열두 번째 이야기
   

산하를 비추리라! 사산비명(四山碑銘) ②

888년(진성 2) 11월, 경문ㆍ헌강왕의 국사를 지낸 무염(無染, 800∼888)이 입적하였다.1) 세수 89년, 법랍 65년. 무열왕 8세손으로 조부[金周川]까지는 진골이었으나 부친[範淸] 대에 육두품으로 강등되었다. 822년 3월 같은 집안 김헌창(金憲昌)이 웅주에서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선덕왕이 후사가 없자 무열왕 6세손으로 왕실 서열 1위였던 부친 김주원(金周元)이 왕좌를 김경신(金敬信) 즉 원성왕에게 넘긴 것이 원통했고, 자신 또한 시중으로 있다가 무주(武州, 광주)ㆍ청주(菁州, 진주)ㆍ웅주(熊州, 공주) 도독으로 내몰리자 불만이 가득했었다. 검술을 좋아한 부친도 혹여 연루되었을까? 「무염화상 비명」의 주석이 ‘헌창공(憲昌公)의 모반과 복주(伏誅)를 보고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로 되어 있다.

이렇듯 나라와 집안이 어수선하던 시절, 12살에 출가하여 설악산에서 능가종(楞伽宗)―북종선 계열―의 선문을 엿보고 부석산에서 화엄경을 연마하던 무염은 817년 사신의 선단에 올랐다. 그때 풍랑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검산도(劍山島, 흑산도)에 내렸다.2) 그리고 5년, 조공 사절 김흔(金昕)―무열왕 9세손으로 한 항렬 낮은 일가―의 배를 타고 산동으로 건너갔다. 김헌창이 부관참시를 당한 직후였다.

무염은 불광사(佛光寺) 여만(如滿)을 찾고, 마곡산(麻谷山) 보철(寶徹) 화상에게 의탁하였다. 마조(馬祖) 도일(道一, 709∼788)의 ‘강서(江西) 문중’이었는데, 특히 보철은 마조의 법사(法嗣)로 인정받았다. 보철이 ‘불법은 동쪽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마조의 예언을 전하며 일렀다.

“나는 지금은 강서(江西, 마조)의 큰아들이요, 후세에는 해동의 대부가 되리니, 선사(先師)에게 부끄러움이 없게 될 것이다.”

그것은 유언이었다. 이후 큰 강 건너고 곽산(崞山)―조선의용군이 활동하였던 태항산이다―을 유랑하며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 보시하여 ‘동방 대보살’ 칭호를 얻었다.

그렇게 20여 년, 신선술에 빠진 황제가 사찰을 파괴하고 승려를 환속시키는 ‘파불(破佛)’을 단행하자, 845년 귀국하였다. 김흔―이때는 민애왕 편에 섰다가 신무왕이 보위에 오르자 산중에서 승려와 살았다―이 알선하여 웅주 서남쪽 바닷가 산중, 백제에서 세워 거의 허물어진 절로 들어갔다. 숭엄산 지금의 보령 성주산의 성주사였다.

선사는 문성ㆍ헌안왕의 귀의를 받고 경문ㆍ헌강왕은 국사로 초빙하였다. 몇 번 궁성 출입도 하였다. 왕도 실천이 불심에 부합함이니, 국왕 스스로 낮추고 공경하고 제대로 관료를 등용해야 함을 진언하였다. 사부대중 법회에서는 진나라 멸망의 도화선을 당겼던 진승(陳勝)의 ‘왕후와 장상에 어찌 종자가 있겠는가!’를 인용하며 분발을 촉구하였다.

“너희들이 생각하지 않아서 걱정이지, 도가 어찌 멀리 있겠느냐? 비록 농부라도 세속 티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도사(導師)와 교부(敎父)에 어찌 종자가 있겠는가!”

‘도가 멀지 않음[道不遠]’은 『중용』에 나온다. ‘어린 시절 유가서(儒家書)’를 읽었던 스님다웠다. 유훈(遺訓)은 잔잔하였다.

“나 이제 멀리 떠나 노닐 터이니, 너희들은 잘살아라.”

입적 후 2년, 여왕이 시호와 탑명을 ‘낭혜(朗慧)’ ‘백월보광(白月葆光)’으로 내리면서 비명(碑銘) 찬술을 하달하였다.

“문고(文考, 경문왕)께서 그대를 국자감 학생으로 선발하여 학문을 닦게 하였고, 강왕(康王, 헌강왕)은 국사(國士)로 예우하였다. 선사의 명(銘)을 지어 두 임금의 덕에 보답함이 마땅하다.”

 

‘무염화상 비명’을 완성한 최치원은 태산(泰山)―태인 태수로 2년 가깝게 지내고, 부성(富城)―서산으로 옮겼다가, ‘신년을 하례하고 황화를 받들어 모실 사신 入朝賀正兼迎奉皇花等使’의 부름을 받았다. ‘황화’는 황제의 조서나 칙사. 그때까지 당의 공식 승인을 받지 못한 진성왕과 신라 왕실로서는 황제의 책봉조서를 받는다면 혼란과 이반을 수습하는데 적잖이 도움이 될 터였다.3)

그러나 떠나갈 수 없었다. 서남해 바닷길은 견훤이 장악하고, 양길ㆍ궁예는 북로의 요충 상주ㆍ원주 일대를 가로막은 것이다. 언제 떠날 수 있을까, 언제라도 가야 한다, 하였으리라. 이즈음 희양산 봉암사의 ‘지증대사 비명’을 마감하였다. 문도(門徒)가 재촉하여 ‘말을 세 번 되새기며 가다듬었던’ 것이다. ‘그림자와 짝한 여덟 번째 겨울[影伴八冬]’이었으니, 헌강왕이 명령을 내린 지 8년만인 893년 겨울이었다.

시절은 허망하였다. 헌강왕 때까지만 해도 민가도 기와를 얹고 나무가 아닌 숯으로 밥을 지었으며 서른다섯 채 ‘쇠드리댁[金入宅]’으로 휘황찬란한 경주였건만, 이제는 세금이 들어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강역마저 쪼그라들었다. 더구나 붉은 바지 걸친 ‘적고적(赤袴賊)’이 주현을 도륙하고 ‘모량부(牟梁部)’―경주 서쪽 원성왕릉과 진흥왕릉이 가까운―의 민가까지 약탈하였다. 여왕은 더 지칠 힘 아니 버틸 뜻조차 없었다. 그래도 무슨 생각이었을까? 이태 전(894) ‘시무책’을 올려 육두품의 가장 높은 관품인 아찬(阿飡)에 오르고도 천령(天嶺), 함양 태수로 나갔던 최치원을 불러들였다.

“문고(文考, 경문왕)가 이룩하시고 강왕(康王, 헌강왕)이 공양을 베푸시어 유리지계(琉璃之界)를 높이셨는데, 아직도 빗돌에 글을 새기지 못하였다.”

‘숭복사 비명’ 찬술을 재차 명령한 것이다. ‘유리지계’는 불국토이지만 원성왕도 무방하다. 약사여래 부처님, 성조(聖祖) 영령이시여! 굽어살피소서, 하였음이 틀림없다. 최치원은 ‘정성껏 두 손 모아 절하고 눈물을 훔치며 붓을 잡았다.’ 숭복사 비석은 896년(진성 10) 어느 달에 세워졌다. 그리고 이해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으로 들어갔다.

지리산 쌍계사(하동)로부터 숭엄산 성주사(보령), 희양산 봉암사(문경), 초월산 숭복사(경주)에 걸친 ‘사산비명’은 상전벽해,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세월의 굴출(崛出)이었다. 그간 어지러운 덧없음, 어이없는 쓰라림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895년 7월 해인사에서 ‘묘길상탑(妙吉祥塔)’을 조성할 때, ‘전쟁과 흉년, 두 재앙이 서쪽에서 그치고 동쪽으로 와서, 악 중의 악[惡中惡]이 없는 곳이 없고 굶주린 시체와 전사한 해골이 들판에 별처럼 즐비한 것’이 아닌가, 하였다.4) 그래도 동국(東國) 해동(海東)에 대한 애착 자긍심은 넉넉하였다.

 

동방은 ‘온누리 비추는 아침해 솟구치고 만물 기르는 큰바람 일어나는’ 땅이며,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오상(五常)의 방위에서도 인(仁)은 동(東)이니, 우리 땅이야말로 ‘인역(仁域)’이며 ‘만물이 생동하는 동방(動方)’이다, 하였다.5) 따라서 우리가 사는 땅은 ‘사람마다 성품이 온유하고 화순하며, 기운은 만물을 발육 생장하는 데 적당한 태평승지’였다.6) 신라가 가장 걸출한 제후국인 까닭이기도 하였다. 이것은 강역이 넓고 군사가 용맹해서가 아니라 더불어 살고 서로 살리는 생활 토양의 힘이었다.

“동쪽 외방을 지키는 제후로서 우리보다 큰 나라는 없다. 지령(地靈)은 살리기를 좋아하는 호생(好生)을 바탕 삼고, 풍속 또한 서로 양보하는 교양(交讓)을 우선으로 하고 있다.”7)

아울러 사람의 마땅한 길, 도를 인식하고 수용하는 자세를 갖추었기에 가능하였다.

“무릇 도란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사람은 나라가 달라도 다르지 않다. 따라서 동쪽 제후의 자제가 석가를 배우고 유가를 공부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반드시 서쪽 큰 바다에 배를 띄우고 두 번 번역하며 배움을 좇아야 한다.”8)

당대 유(儒)ㆍ불(佛)ㆍ도(道) 삼교를 받아들이며 그런 역량을 발휘하였다는 사실을 지증대사 탑비에 분명히 풀었다.

 
鷄林地在鼇山側 오산 곁에 있는 계림 땅에
仙儒自古多奇特 예로부터 도교와 유교에 기특한 자가 많았네.
可憐羲仲不曠職 아름다울손 직분에 충실한 우리 임금,
更迎佛日辨空色 다시금 부처를 맞아 공과 색을 분별했다오.
敎門從此分階墄 이로부터 교문이 여러 층으로 나뉘고,
言路因之理溝洫 그로 인해 언로가 조리 있게 뻗어 나갔지.
 

삼교가 꽃피우며 생각이 넓어지고 말길[言路]이 트인 나라, 그런데 당신은 정녕 고유 풍속, 전통의 심연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은 일부만 전하는 ‘난랑비(鸞郞碑)’에 적었다.9)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설교(說敎)의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갖추어져 있는데, 기실 삼교(三敎)를 포함하여 군생(群生)을 교화한다. 또한, 노나라 사구(司寇)는 ‘들어가면 집에서 효도하고 밖에서는 나라에 충성하라’ 가르쳤고, 주나라 주사(柱史)는 ‘일을 작위(作爲)로 하지 않으며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함’을 으뜸 삼았으며, 축건태자(竺乾太子)는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 교화하였다.”

우리 고유한 국풍(國風), 풍류선교(風流仙敎)가 유(儒)ㆍ노(老)ㆍ석(釋) 삼교와 융합하며, 외향적 충효 의무와 내재적 자연도덕, 그리고 일상의 선행 자비의 실천을 통하여 사상문화를 한 차원 높이고 생활 지혜를 배양하는 바탕이 되었다는 것이다. 동국 해동의 문화의식, 국풍(國風)의 자각이었다.

 
1) 『고운집』 권2, 「무염화상 비명병서 無染和尙碑銘竝序」
2) 『고운집』 권1, 「태사시중에게 올린 장문 上太師侍中狀」 및 권2, 「무염화상 비명병서 無染和尙碑銘竝序」; 『삼국사기』 권44(열전 4) ‘金昕’ 817년 입당사는 풍랑으로 절강성 명주(明州, 오늘날 닝보 寧波)까지 떠내려갔다. 이때 무염은 바다에 빠졌다가 겨우 흑산도에 올라 목숨을 보전하였다. 훗날 신진 사림 최부(崔溥, 1454∼1504)도 제주도를 나오다가 추자도부터 표류하여 닝보에 내렸다. 거센 풍랑에도 추자도―흑산도―닝보 또한 한 물길이다. 선화봉사(宣和奉使) 서긍(徐兢)도 이 길로 고려에 왔다.
3) 『삼국사기』 권46(열전 6) ‘최치원’ 893년(진성 7) 책봉을 요청하는 ‘납정절사(納旌節使)’가 익사하자, 곧바로 고주사(告奏使)와 하정사를 선임하였다. 그간 국내 사정을 알리고 책봉을 요청할 요량이었다.
4) 「海印寺妙吉祥塔記」 895년(진성 9) 7월 해인사에서 호국을 기원하고 원혼을 위로하고자 ‘묘길상’ 즉 지혜의 문수사리 탑을 봉안할 할 때 지었다.
5) 『고운집』 권2, 「무염화상 비명」 “惟俊風與旭日 俱東方自出也” 및 「진감화상 비명」 “大覺上乘 我仁域” 및 권3, 「지증화상 비명」 “五常分位,配動方者 曰仁”
6) 『고운집』 권3 「대숭복사 비명」 “我太平勝地也, 性玆柔順 氣合發生.”
7) 「지증화상 비명」 “東諸侯之外守者 莫我大也, 而地靈旣好生爲本, 風俗亦交讓爲先.”
8) 「진감화상 비명」 “夫道不遠人, 人無異國. 是以東人之子 爲釋爲儒, 必也西浮大洋, 重譯從學” 『중용』과 『시경』 「소아(小雅)」 ‘대동(大東)’을 인용하였다.
9) 『삼국사기』 권4, 진흥왕 37년(576) ‘崔致遠鸞郞碑序’

글쓴이 이종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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