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폭의 그림, 하나의 이야기] "매사냥꾼 매를 매고 높은 산으로 오르고…" 게시기간 : 2025-05-14 13: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5-05-13 13:21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한 폭의 그림, 하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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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이 쓴 매사냥에 관한 시의 일부이다. 바로 눈앞에서 매사냥을 본 것처럼 생생하다. 매사냥은 오래전부터 회화의 주제였는데, 18세기 광주에서 활동한 화가 경암 김익주가 남긴 <응수도>는 정약용이 시에서 묘사한 것 같은 장면을 시각적으로 구현해 낸 그림이다(그림 1). 18세기 광주화가, 어진을 그린 김익주 도화서에 소속되지 않고 방외方外에 거주하면서 활동한 화가들을 방외화사方外畵師라 하였다. 이들은 관청이나 관료, 사대부와 부호들에 의탁하여 활동하면서 어진 제작 등 궁정의 회사繪事에 참여한 화가들이다. 김익주는 광주에서 활동한 직업화가로 18세기 어진도감에 두 번이나 언급되며 방외화사로 이름을 올렸다. 김익주는 호는 경암鏡巖이고 1684년에 태어났으며 1739년에 제작한 작품이 있어 55세 이후까지 18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것이 확인된다.2) 김익주에 대한 기록이 영세하여 본관이나 몰년조차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현재 전해지는 20여 점이 넘는 다양한 화목畵目의 작품과 승정원일기를 비롯한 의궤도감에 참여했던 기록, 그리고 당대 몇몇 인사들이 남긴 짧은 평을 통해 김익주의 활동상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김익주는 광주에서 살았는데, 승정원일기에 이에 대한 단서가 남아있다. 1713년(숙종 39) 숙종의 어진을 그리기 위하여 설치된 도감의 당시 제조였던 공조판서 김진규金鎭圭(1658-1716)는 어진을 그릴 화가로 김익주를 추천하며 “경중京中사람 김익주는 그림을 잘 그리는데, 광주에 흘러들어 살고 있다.”고 하였다.3) 이와 함께 18세기 김익주와 동시대를 살았던 권섭權燮(1671-1759)이 쓴 「십육찬十六讚」 김익주조金翊胄條에도 그가 광주에 살고 있음을 알려준다. 김익주金翊冑 산수山水
김익주는 광주光州 천인인데 호남에서 걸출하여 오두상吳斗相, 김승종金承宗, 박세린朴世獜, 양희맹梁希孟 등이 서울에 올라왔을 때 각 사람을 위해 그림을 그려주었다. 어떤 이는 정원백鄭元伯(鄭敾), 윤두서尹斗緖를 낮게 평가하고 김익주를 높이 치는 자도 있었다. 김익주는 조세걸曺世傑과 화법이 다른데 각기 장단점이 있었다.4) 서울 출신이던 김익주가 어떠한 연유로 광주에 정착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1713년이면 김익주의 나이 29세로, 이미 그는 광주에서 살고 있었으며 화가로도 이름이 알려져 있던 상태였다. 김익주는 김진규의 추천으로 상경하였으나 이 도사도감에서 봉사하지는 못했다. 이후 20여 년이 지난 1735년 영조 11년에 있었던 『영정모사도감의궤』에 다시 이름이 거론되며 참여하였다. 영희전永禧殿 제2실에 봉안되어 있던 세조의 어진을 새로 제작한 행사의 기록으로, 이때 도화서 화원으로 박동보朴東普, 양기성梁箕星, 장득만張得萬 등이 참여하였고, 방외화사로는 호남화가인 이치李𤦮, 양희맹梁希孟, 김익주 등이 뽑혔으나, 김익주와 이치가 주관화사 자리를 놓고 경합하였다. 승정원일기에 영조와 대신들이 김익주와 이치를 놓고 비교하며 주관화사를 결정하는 활발한 논의의 기록을 볼 수 있다.5)
김익주의 평가는 이치에 비해 덜 정묘하고 미숙하긴 하지만 앞으로 명성이 높아질 것이라 했고, 채색을 베푸는 솜씨나 생동감 있는 화면을 그려내는 점에서 이치보다 뛰어나다고 하였다. 영조는 김익주를 집필케 하려 했으나 김익주가 주저하는 태도를 보이자 결국 이치가 주관화사主管畫師로 결정되고, 김익주는 동참화사同參畫師, 장득만, 양희맹, 양기성은 수종화사隨從畫師로 정해졌다. 한편 윤덕희尹德熙(1685-1776)와 조영석趙榮祏(1686-1761)도 당초부터 참가시키려 하였으나 윤덕희는 상경하였다가 시재에 불참하였고 조영석은 여러 차례 어명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오지 않았다.
![]() 그림 2 김익주, <파조귀래도>, 《석농화원》, 18세기, 비단에 먹, 26.7×35.6cm, 선문대학교박물관 소장
![]() 그림 김익주, 〈群馬圖〉, 18세기, 종이에 엷은색, 32.0×63.5cm, 국립광주박물관소장 김익주는 직업화가로 활동하며 다양한 작품을 제작하였다. 어진을 그렸을 정도로 초상화도 뛰어났으리라 생각하지만 김익주가 그린 초상화나 인물화는 드물다. 반면 당대의 평은 그의 특장特長이 산수화라고 하였다. 서화수집가이자 비평가인 김광국金光國(1727-1797)은 김익주를 남리南里 김두량金斗樑과 비교하였고(그림 2), 앞서 권섭은 세간의 평을 빌려 정선, 윤두서, 조세걸 등과 비교하기도 하였다. 김익주의 제작연도가 밝혀진 가장 이른 작품은 1719년 제작된 <운룡도>를 포함한 5폭의 <청설모>, <군마도>, <우도>, <납견방문도臘犬訪問圖> 등이다. 이 작품들은 한 화첩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한 폭씩 독립된 작품으로 전한다. 이중 <군마도>는 절파화풍의 배경에, 윤두서, 윤덕희 부자와의 화풍상의 유사점이 발견되지만 각각의 동물묘사에서 대상을 관찰하고 그린 듯 형태와 묘사력에서 김익주가 더 뛰어난 솜씨를 보여준다(그림 3).
1730년에 제작된 《초충영모어해산수도첩》 12폭에는 산수화 1폭, 새그림 2폭, 어해도 2폭, 양 그림 1폭, 호랑이 1폭, 화훼초충도 5폭이 실려 있다(그림 4). 제작연도가 확실한 만큼 김익주의 회화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다. 도첩에 실린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조금 경직된 면도 있지만 필치가 정교하고 구성에 짜임새가 있다. 새 그림에서는 조속趙涑(1595-1668)의 중기화풍과 양식적인 공통점을 보이기도 하고, <개구리>의 경우 정선 그림과도 비교해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호랑이>는 1720년 『숙종명릉산릉도감의궤』의 <백호>와 유사점이 발견되는데, 호랑이의 동세와 발의 위치, 꼬리의 모양에 이르기까지 두 그림에는 공통된 범본範本의 양식이 적용된 듯하다.6) 김익주의 호랑이는 소나무와 함께 그려지며, 이러한 구성은 1750년에 제작된 정홍래의 <산군포효도>와 김홍도의 <송하맹호도> 등으로 이어지는 호랑이 그림의 양식적 기반을 마련해 준 것으로 생각된다[표 1].
김익주는 소재나 기법, 표현형식에 구애를 받지 않고 동물화와 화조, 어해 등 다양한 화목을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응수도>는 풍속인물화, 동물화의 영역에서 55세의 무르익은 김익주의 뛰어난 솜씨를 살필 수 있는 작품이다. “수지니 날지니 해동청 보라매”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매사냥을 즐겼다. 일찍이 고구려 삼실총, 안악 1호분, 장천리 1호분 벽화의 매사냥 그림 확인할 수 있듯이 오래전부터 회화의 주제가 되었다. 『삼국유사』, 『삼국사기』를 비롯해 고려시대에는 매의 사육과 사냥을 전담하는 응방鷹坊이라는 관청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도 여전히 응방과 응방군까지 있어서 매사냥이 성행하였는데, 태종, 성종, 연산군 등이 매사냥을 자주 했다는 기록이 전하며, 중종 때 일부 폐지되긴 하였으나 민간에서 행하는 매사냥은 금지하지 않았다.
![]() 그림 5 김홍도, <호귀응렵도> 부분, 종이에 담채, 28.0×34.2cm, 간송미술관 소장
![]() 그림 6 김준근, <매사냥 가고> 부분, 종이에 채색, 26.2×35.6cm,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18세기 무렵 많은 화가들이 매사냥을 주제로 작품을 남겼다. 김홍도의 <호귀응렵도豪貴鷹獵圖>는 어느 겨울 한 선비가 말을 타고 일군의 무리를 이끌고 매사냥을 나온 장면을 그린 것이다(그림 4). 말을 끄는 시종과 일산日傘을 들고 있는 시종, 그리고 머리에 짐을 인 여인과 시동으로 보이는 아이, 갓을 쓴 인물 등이 뒤따른다. 이 가운데 매사냥을 하는 이는 두 명으로, 한 명은 막대기를 들고 사냥짐을 지고 있으며, 또 한 명은 매가 꿩을 낚아채는 순간 제지하려 다가가는 모습이다. 두 마리의 사냥개가 주변에서 짖어대며 매가 사냥에 성공하였음을 알려준다. 19세기에 그려진 김준근의 <매사냥 가고>에는 4명의 사람들이 지팡이를 들고 매사냥을 나가는 모습을 그렸다(그림 5). 매를 길들여 사냥을 하는 전문 사냥꾼을 가리켜 조선시대 직책으로 응사鷹師라고 칭하였으나 민간에서는 매부리·매꾼 또는 봉받이(꾼)이라고 불렀다. 그림에는 매를 조정하는 수알치, 꿩이 숨어 있는 잔솔밭을 터는 털이꾼, 매나 꿩이 날아가는 방향을 알려주는 매꾼 등 4명이 한 동아리를 이루고 있다.
김익주가 그린 <응수도>에는 두 명의 매꾼과 두 마리의 사냥개, 그리고 두 마리의 매가 등장한다. 두 명의 매꾼은 각각 지팡이를 짚고 서로 약간 비껴서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다. 이는 인물화의 고식古式 구성법으로, 김익주보다 앞 세대의 화원화가 이명욱李明郁의 <어초문답도>에 등장하는 인물구성법과도 유사하다. 음영법이 아닌 꼼꼼하고 세밀한 필치로 이목구비를 묘사하고, 의복에는 적절한 채색을 더하여 옷자락과 옷매무새를 표현하였다. 노출된 다리의 골격과 근육, 짚신을 신은 발의 묘사가 자연스럽다.
![]() 그림 1-1 <응수도> 인물부분 매사냥꾼 옆에는 두 마리의 사냥개가 함께 한다(그림 1-2). 매사냥에는 무엇보다도 사냥개가 필수였다. 꿩을 좇기도 하지만 매가 잡은 꿩을 물어다 주인에게 갖다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사냥에 적합한 개로 풍산개·삽살개·진돗개 등을 이용하였는데, 진돗개는 용감하고 영리하기로 유명했다. 그림에 묘사된 누런 개와 까만 개의 목에는 방울이 달려있으며 귀가 쫑긋하고 날렵해 보이는 몸집에 꼬리가 말려 올라간 모습이 진돗개로 보인다.
![]() 그림 1-2 <응수도> 사냥개 부분 사냥을 하는 매는 송골매라 하며, 새끼를 길들여서 사냥에 쓰는 매를 보라매라고 하고, 보라매를 해동청海東靑이라고도 부른다.7) 두 마리의 매 가운데 왼쪽 인물의 팔에 앉아 있는 매의 발목에는 붉은색 절끈이 묶여있다. 매의 발톱이 날카롭기 때문에 매꾼은 팔뚝에 두툼한 토시를 끼고 매를 받아 들었다(그림 1-3). 훈련이 된 매는 매꾼의 팔이 자기 자리인 양 얌전히 앉아 있다. 화면 상단에 또 한 마리의 매가 공중에서 사냥감인 꿩을 뒤에서 매섭게 덮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그림 1-4). 매의 꼬리에는 매 주인을 알 수 있는 시치미가 달려있다. 혼비백산한 꿩은 죽을힘을 다해 도망을 가지만 공중에서 방향을 틀어 뒤쫓아가는 매는 유유히 낚아챌 타이밍을 노리는 듯하다. 매사냥의 생생한 현장감이 돋보인다. 한편 배경의 암석에는 부벽준을 사용하면서 먹의 농담을 달리하여 바위의 입체감을 나타냈으며, 짙은 태점苔點을 가했다. 좌측 암석에서 자란 뒤틀려 있는 소나무는 옹이와 나무껍질 등을 묘사하여 입체감을 표현했다. 오른쪽 바위 주변과 바닥에 푸른색의 점을 찍어 수풀을 표현하였는데, 이처럼 섬세하고 세밀하게 표현된 배경은 17-18세기에 성행한 원체화풍院體畫風의 풍속인물화 형태를 취하고 있다.
![]() 그림 1-3 <응수도> 매부분 앉아있는 매(사진출처:인터넷)
![]() 그림 1-4 <응수도> 사냥하는매 ‘명성을 취한다면 김익주가 제일’ 김익주는 영조의 눈에 들어 어진도사에 참여했다. “김익주가 그림 그리는 것을 종친부의 계병契屛에서 본 적이 있었는데 그중 한 그림이 범상치 않고 필력이 몹시 굳세었다.”라고 한 영조는 어진도사를 시작하기 전부터 김익주를 익히 알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영조는 김익주가 주관화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김익주가 주저하는 탓에 동참화사에 그쳤다는 것은 전술한 바이다. 이를 결정하는 과정 중에 흥미로운 것은 대신들이 김익주의 성격과 태도 등을 그닥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점이다. 승정원일기에 기술된 몇 가지 사례를 보면, 그는 다소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던 듯하다. 김익주가 전라도에 있을 때 화상을 그리게 하였더니 그다지 조용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서울 재상가에서 화상을 모사할 때 조금이라도 뜻에 맞지 않으면 곧 버리고 떠났다고 하였다. 또 어진도사 일로 도감에 머물 때 불결한 곳에 왕래하지 못하도록 하교하였으나 김익주는 간혹 출타하기도 하여 “사람됨이 선량하지 못하고 마음 씀이 바르지 못하다”라는 말을 듣기도 하였다. 영조 또한 이를 두고 ‘제멋대로인 본색’이라 하였다. 그럼에도 영조는 김익주에 대한 두터운 신뢰를 보여준다. 대신들이 김익주의 행실을 비판할때도 영조는 “평소 미치광이 같은 태도가 있다”라고 하면서도 “진짜로 미친 사람이라면 이렇지 않을 것이며 국가의 화상을 어찌 감히 그렇게 하겠느냐”며 그를 옹호하였다. 이외에 “평소 그림에 뛰어나고 모든 체재를 구비하여 명성을 얻은 지 이미 오래다”라는 등 김익주에 대한 영조의 평이 상당히 후한 것을 알 수 있다. 전술한 내용 외에도 김익주의 “생동하는 그림을 버려두고 쓰지 않는다면 아깝다”거나 “명성을 취한다면 김익주가 제일이다”라고도 하였다. 또한 영정을 모사하기 전 원본을 보는데 김익주의 얼굴에 땀이 흐르는 것을 보고 “날이 더워 흘리는 땀이 아니라 겁이 나서 흘리는 땀이라며 잠시 물러나 쉬고 마음을 진정시키고서 오게 하라”고 하기도 하였다. “김익주가 이처럼 뛰어난 재주를 끝내 쓰지 못하였으니 어찌 아깝지 않겠느냐”는 영조의 배려로 김익주는 겸교수가 되었고 나중에 동반정직을 제수받았다. 이렇듯 김익주의 성정이 자유분방하고 거칠고 제멋대로였음에도 불구하고 영조의 김익주에 대한 인정과 신뢰가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비록 김익주가 지방화가이지만 중앙의 도화서 화원에 못지않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영조 또한 김익주의 예술가 기질로 인정해 주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김익주는 18세기 윤두서·윤덕희 일가의 활동 이외에도 호남 전통화단의 주요한 화가였음이 분명하다. 특히 그의 회화활동은 중앙화단과의 관계 속에서 화풍의 지방화단의 양상을 규명할 수 있는 시도가 될 수 있으며 18세기 호남화단의 풍성함과 다양성을 찾는 일례가 될 것이다. 1) 정약용, 『여유당전서』, 詩集 卷三, 「최사문유렵편에 화답하다和崔斯文游獵篇」https://db.itkc.or.kr/dir/item?itemId=GO#/dir/node?dataId=ITKC_MP_0597A_0030_010_1240 한국고전종합DB, 2025년 4월 10일 검색)
2) 김익주에 대해서는 진준현, 「肅宗代 御眞圖寫와 畵家들」, 古文化46(1995), 100-102쪽;진준현, 「英祖, 正祖代 御眞圖寫와 畵家들」, 『서울대학교박물관 연보』6호(1994), 41-43쪽에서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행적이 밝혀졌으며, 김익주에 대한 연구논문으로는 김소영, 「18세기 호남의 방외화사 김익주(金翊胄, 1684~1739년 이후) 연구」, 『호남학』제75집(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23), 213-247쪽 참조. 3) 『승정원일기』1713년 4월 11일 기사, “…鎭圭曰, 京中人金翊周善畫, 而方流寓光州, 此人曾前亦畫士夫像云矣。竝爲行會本道, 使之給馬上送, 何如? 頤命曰, 宜使平安·全羅兩道, 給馬上送矣.” 김익주의 한자 ‘周’자는 잘못 기록된 것으로 간주하고 ‘冑’자로 고쳐 제시한다 4) 權燮, 雜著3, 「十六讚」. 金翊冑光州賤人 傑出湖南中於吳斗相金承宗朴世獜梁希孟之 上來京師 而爲人 人作畵或有舍 鄭元伯尹斗緖而取之者 金與曺世傑 異法各有長短. 권섭 저, 이창희·장정수·최호석 편, 『玉所稿』8(다운샘, 2007), 338쪽. 5) 『承政院日記』 1735년 8월 3일부터 9월 19일까지 기사 참조. 6) 윤진영,「조선중․후기 虎圖의 유형과 도상-기년작을 중심으로」, 『장서각』28(한국학중앙연구원, 2012), 192-234쪽 참조 7) 매사냥에 대해서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7949 참고문헌 『承政院日記』
정약용, 『여유당전서』 권섭 저, 이창희·장정수·최호석 편, 『玉所稿』, 다운샘, 2007. 김소영, 「18세기 호남의 방외화사 김익주(金翊胄, 1684-1739년 이후) 연구」, 『호남학』제75집,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24), 213-247쪽. 윤진영, 「조선중․후기 虎圖의 유형과 도상-기년작을 중심으로」, 『장서각』28(한국학중앙연구원, 2012), 192-234쪽.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7949 https://db.itkc.or.kr/dir/item?itemId=GO#/dir/node?dataId=ITKC_MP_0597A_0030_010_1240 한국고전종합DB 글쓴이 김소영 한국학호남진흥원 연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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