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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학산책

[문화재窓] 광주의 풍교(風敎)를 다스린 광주향교 게시기간 : 2021-02-24 07:00부터 2021-03-23 16:10까지 등록일 : 2021-02-23 16:14

조회수 :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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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窓 스물다섯 번째 이야기2021년 2월 24일
스물다섯 번째 이야기
   

광주의 풍교(風敎)를 다스린 광주향교

 

이로 인하여 유학의 풍교가 크게 진작되고, 유학의 가르침이 더욱 밝아지게 되었다. 단정하고 올바른 사람을 선택하여 향교의 재장(齋長)으로 삼고 사표(師表)가 되어 교생들을 통솔하게 하였다. 그들을 예의로서 대우하여 향촌민들이 예의염치를 알도록 하였다.(由是儒風大振, 文敎益明. 簡選端方, 使爲齋長, 以作表率, 待之以禮, 養其廉恥.)

 

정약용의 『목민심서』(권7, 예전 흥학조)에 나오는 글이다. 권수평(權守平) 현감의 일화에 대한 평가이다. 고을 수령으로서 지방 관학인 향교에 대한 지원이 모범적 사례가 된 것.

 

수령의 향교 지원 사례, 목민심서에 오르다

 

현감 권수평은 유학자로 1488년(성종 19) 광산에 부임한 이후 고을의 폐단을 없애고 적체된 옥사를 처리하면서 민생을 살폈다. 특히 성안에 있던 향교의 부흥에 노력하는 등 교육과 교화에 앞장섰다. 광주는 당시 광산으로 불리웠고 읍격은 현이었다. 판관 우윤공이 부민이 쏜 화살에 맞는 사건이 일어나 광산현으로 강등되었고, 이 무렵 부임해 온 권수평 현감은 향민 교화에 그만큼 힘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성현(1439∼1504)은 「광산향교 중수기」(1500년,『허백당집』권4)에서 권수평의 치적을 소개하고 있다. 성안에 있던 옛 향교는 지대가 낮고 좁았으며 건물이 기울고 낡아 강학의 장소로 적당치 않기에 고을 부로들과 상의해 성의 서쪽에 터를 잡고 학교를 건립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권수평의 노력에 많은 백성들이 감동하여 협력하였는데, 특히 향교 재정을 위하여 권수평이 사재를 출연하였던 것을 귀감으로 삼았다.

 

권수평은 향교 앞 백성의 땅을 사들여 논과 채마밭을 만들고, 또는 향교 소속 노비들의 집을 마련하였으며, 또 백성들의 밭을 사서 반은 향교에 기부하고, 반은 사마재에 주어 재정의 바탕으로 삼게 하였다. 또 세금으로 들어온 면포(綿布) 백필, 쌀 백석, 콩 이십석을 향교 교생들의 비용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교생들의 면학을 위하여 사서, 오경,제자서,운서(韻書)등을 마련하여 열람하게 하였다. 이러한 재정적 물적 지원은 감사와 도사(都事)들도 참가하였는데, 감영(監營)에 있는 무명 40여 필, 조세 곡식 50여석을 광주향교에 지원해 주었다고 한다

그림1
[그림 1] 광주 향교 전경(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9호, 사진 광주문화유적분포지도)
그림1
[그림 2] 조선시대 후기의 광주향교 지도(1872년, 광주지도, 규장각 소장)
 

세번째 자리잡은 향교, 정원봉-성안-서2리

 

광주향교는 권수평에 의해 현 위치에 자리 잡으면서 풍교(風敎)의 중심이 된다. 처음 자리는 서석산[무등산] 장원봉 아래. 이곳에서 호환이 잦아서 성안(동문 안)으로 옮겼다. 다시 권현감이 부임하여 광산현 읍치 서쪽 2리 현 위치로 옮겼다. 막상 성안 저자거리로 향교를 옮기자 시정의 소란스러움에 학교의 풍취를 잃었고, 게다가 지대가 낮아 홍수의 피해를 입게 되어 옮긴 것이다.

 

장원봉 : 곧 무등산의 지봉이다. 속설에 향교가 옛날에는 이 봉우리 아래에 있었는데, 이 고을 사람 중에 장원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생겼다 한다.(壯元峯 : 即無等山支峯 俗傳 鄕校舊在峯下 邑人中 壯元者多 故名 ; 『신증동국여지승람』 35 광산현 산천 신증조)

향교 : (광산)현의 서쪽 2리에 있다. 옛날에는 성안에 있었는데, 현감 권수평이 이리로 옮겼다.(鄕校 : 在縣西二里 舊在城內 縣監權守平移構于此 ; 광산현 학교조)

 

그림3

[그림3] [유기] 장원봉 아래 향교가 있었다는 기록(『신증동국여지승람』 광주 산천조)

 

그림4

[그림4] 성안에 서 현 서쪽 2리로 권수평 현감이 옮긴 기록(학교조)

 
그림5
[그림 5] 관리들의 근무성적[고과]을 평가한 전최문서. 조선시대에는 학교의 흥폐(興廢)로써 수령들을 고과(考課)하는 법을 삼도록 할만큼 흥학을 중요시 하였다. 전라도관찰사는 지방관에 대하여 매년 두 번씩의 평가를 하는데 정사년(1797년) 봄 전최에서 광주목사는 ‘上’의 평가를 받았다.(사진 전라도관찰사 전최제목, 정사년, 옥과현감 위백규 후손가 소장)
 
그림6
[그림 6] 광주향교 대성전 상량문(부분, 기대승 찬, 고봉집)
 

1560년(명종 15)에 유경심(柳景深) 목사로 부임하여 중수한다. 기대승(1527∼1572)은 「대성전 중수 상량문」(『고봉집』)을 남겼다. 1563년 기록이다. 앞서 성현이 지은 이건 기록은 향교 이건에 중점을 두어 수령의 치적 중심으로 기술하였다. 반면 기대승은 수령의 활동 보다는 향교로 인해 풍교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기술하고 있다.

 

기대승은 중수된 향교에서 유학적 교화가 크게 일어나 광주지역에 유교적 이상정치가 실현되기를 기대하였던 것이다. 마치 공자가 제자 자유(子游)가 읍재로 있던 무성(武城)에 갔을 때, 거문고 가락에 맞춰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자유가 예악을 실천하고 있는 것을 확인한 것처럼, 광주에서 예악에 근거한 정치가 이루어져 향촌민의 교화가 이루어지길 고대하였다.

 

이무렵 비석도 세운다. 광주향교 중신기(光州鄕校重新記). 앞면은 고봉 기대승이 지었고 뒷면 음기는 회재 박광옥(1526~1593)의 글.

 

박회재는 고을 선비들의 흥학을 위해 향교에 학전(學田)을 마련한 것을 적었다. 권수평현감이 논 2결 45부, 밭 1결 70부 9속, 이홍간목사(1543~1550년 재임)가 논 1결 70부 9속, 유경심 목사(1560~1563년 재임)가 논 3결 66부 3속, 밭 37부 5속을 마련하였다. 유목사는 조세가 밀려 갚을 수 없는 사람의 조세를 탕감해주도록 하고 흥학을 위해 향교에 논을 내놓도록 권유하였다. 광주고을 선비들은 자원하여 논 1결 19부를 낸다. 조세도 탕감 했으리라.

 

끝에 “무릇 돌이란 그 수명이 수백년은 지탱한 것이니 세도(世道) 높 낮음과 인사(人事)의 변천을 이 돌을 보고 알아 흥기(興起)할 사람이 어찌 없겠습니까?”라 하였다. 오늘날 어려운 여건에서도 전세금을 감해 주는 선행이 오르내리는데, 광주에서 460여년전에 비롯된 흥기가 아닐까.

 

1600년 전당과 방실 중수, 강항의 중수상량문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향교가 훼손된 뒤, 1600년 목사 이상길이 부임해 전당(殿堂)과 방실(房室)을 새로 지었다. 이에 강항(1567∼1618)은 광주향교 중수상량문(『수은집』)을 남겼다. 강항은 광주의 교화는 다른 곳에 견줄 바 없는 수준으로 높고, 선비들은 유학 천년의 전통을 터득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끝난 지금도 유학의 도(道)를 의논하는 생원 수가 대폭 늘어날 정도라고 하면서 뛰어난 인걸들이 태어났으니, 이는 산천의 뛰어남과 아름다움에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교학(敎學)의 효과라고 평가한 것이다. 즉 향교에서의 유교적 교육-교화로 유교적 이상사회 실현을 기대했던 것이다.

 

1804년 목사 김선(金銑, 1750∼?)에 의해 개수된다. 김목사는 봉록을 내어줘 자금을 충당하게 하였으며, 민역(民役)의 수고로움을 피하여 추수가 끝난 10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3월 준공시키고 향음주례를 베풀어 온 고을 선비들에게 교화의 기회로 삼았다.

 

기학경(1741∼1809)이 「향교 중수기」(『겸재집』)를 지었는데 기대승의 후손으로 주자의 실천윤리를 강조하고 있다. 특히 광주는 호남의 중심으로 물산이 풍부하여 사람들이 굳세고 영특하고 기절(氣節)을 숭상하고 문예를 좋아하여 그 이름을 날렸던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는 광주인식을 부각시키고 있다. 나아가 광주향교는 도학과 문장의 전통을 형성하고, 지역민에게 충효와 절의의 풍습을 지키게 하여 남방 학문의 정화를 얻게 하는 중심에 있다고 하였다.

 

1798년 ‘어제조문’과 ‘어고방’을 봉안하다

 

1798년에는 ‘어제조문(御製條問)’과 ‘어제(御題)’, 그리고 ‘어고방목(御考榜目)’이 광주향교에 명륜당에 보관된다. 봉안각이라 하였는데 아마도 누상고(樓上庫) 형태였을 것으로 보인다. ‘어제조문’은 1797년 정조가 지은 『어정대학연의(御定大學衍義)』, 『연의보』, 『주자대전절약(朱子大全節約)』을 호남 선비들이 교정하도록 광주목사 서형수(1749~1824)를 통해 내려 보낸 것이다. 이때 84명의 호남 인재들이 참여 하였고, 그에 대한 우대책의 일종으로 1798년 광주목에서 도과 시험을 치른 것이다.

 

이 도과의 시험 문제가 ‘어제’이고, 합격자 명부가 ‘어고방목’이다. 시험에는 69명이 참여하였고 53명이 합격하여 점수가 가장 높은 2명(고정봉, 임흥원)에게는 직부전시(直赴殿試) 자격이 주어졌다. 2차 시험 없이 임금 앞에서 치르는 전시를 바로 치르게 하는 특전이다. 임금이 직접 검토하여 “어고(御考)”라는 첨지가 함께 있다.

 

1841년 8월 11일 밤에 명륜당이 실화로 화를 입자 부본을 다시 만들어 보관한다. ‘어고방’은 고정봉가에 전하는 문서로 사본을 만들었다고 한다. 고정봉의 ‘어고방’은 광주역사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림7
[그림 7] 광주향교 봉안 어제책문(御題策問)(1798년 광주목 도과에서 정조임금이 출제한 책(策)의 시제(試題)(『광주 향교지교』권4)
 

조철영(1777∼1853) 목사 재임 때 명륜당과 동서 재실이 화재를 입은 뒤 중수하고 완공을 축하하기 위하여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시행하여서, 효제의 도리와 강학의 도를 가르쳤으니 이것이야 말로 정치의 근본을 아는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1854년(철종 5) 부임한 홍재응(洪在應) 목사는 향교 중수를 하면서 주민들에게 재물을 염출하거나 노역을 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온 고을의 대소사서인들이 모두들 기뻐하면서 목사의 공적을 칭송하였다. 기정진(1798∼1879)이 「문묘 중수기」 통해 광주도 홍목사의 교화를 받아 뛰어난 인재를 배출하는 호남 으뜸의 고을이 되기를 기대하였다.

그림8
[그림 8] 광주향교중신기 비(1563년, 앞면 기대승 지음, 뒷면 박광옥지음)

글쓴이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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