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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학산책

[명시초대석] 1519년 초겨울 광주 분수원에서 맞잡은 두 손 게시기간 : 2020-12-03 07:00부터 2030-12-16 21:21까지 등록일 : 2020-12-02 11:01

조회수 :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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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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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초대석 스물 네 번째 이야기2020년 12월 3일
스물 네 번째 이야기
   

1519년 초겨울 광주 분수원에서 맞잡은 두 손

 

「효직의 상을 당하여〔逢孝直喪〕」2

 
분수원 앞에서 일찍이 손을 맞잡았는데 分手院前曾把手(분수원전증파수)
그대가 황각에서 주애로 떨어지니 괴이하다 怪君黃閣落朱崖(괴군황각락주애)
주애와 황각을 구별하지 마시게 朱崖黃閣莫分別(주애황각막분별)
황천에 이른다면 차등이 없어지리니 纔到九原無等差(재도구원무등차)
 

박상(朴祥) 지음(『눌재속집』 권2)

 
 

1. 조광조의 죽음을 슬퍼한 만시(輓詩)

 

이 작품은 눌재(訥齋) 박상(朴祥, 1474~1530)이 조광조(趙光祖)의 죽음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만시(輓詩)이다. 작품의 내용을 쉽게 풀이해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분수원 앞에서 일찍이 조광조의 손을 맞잡았는데, 이제 벼슬에 있던 그대가 유배를 가니 이상한 일이로다. 벼슬에 있는 것과 유배 가는 것을 굳이 구별하지 말라. 만일 죽음에 이른다면 결국 벼슬과 유배는 차이 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의 제목에서 말한 ‘효직’은 조광조의 자이고, 시에서 언급한 ‘분수원’은 박상이 살았던 시절에 광주 남문 밖에 있던 관청에서 운영하던 숙소를 가리킨다. ‘황각’은 조선 시대에 가장 높은 행정 관청인 의정부를 달리 일컫던 말이고, ‘주애’는 중국 남방의 해남도(海南島) 해구(海口) 부근에 있던 지명이다. 가장 험준하고 중앙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대신들이 죄를 지으면 이 주애 땅으로 유배를 갔다. 이후 주애는 유배지의 대명사처럼 쓰였다.

 

2. “개혁! 개혁!” 지나친 개혁을 꿈꾼 것일까

 

그렇다면 조광조(1482~1519)는 어떻게 한양과 멀리 떨어진 능주까지 와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까?

조광조는 34세에 문과에 합격한 뒤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조광조가 거쳐 간 벼슬은 사헌부 감찰, 사간원 정언, 호조ㆍ예조ㆍ공조 좌랑, 홍문과 수찬, 홍문관 부제학 등등. 그러나 이러한 벼슬보다 더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당시 신진사류로서 조광조가 내놓은 개혁안이었다. 우선 37세에 홍문관 부제학에 오른 조광조는 현량과(賢良科) 설치를 당시 임금인 중종에게 요구하여 허락을 받는다. 현량과란 경학(經學)에 밝고 덕이 높은 사람을 천거하도록 하여 대책(對策)으로 시험을 보아 인재를 선발하는 것을 말한다. “경학에 밝고 덕이 높은 사람” 부분에 방점이 있기 때문에 보통 과거시험을 치러 인재를 선발하는 방법과 차이가 있었다. 현량과 설치 허락을 받은 조광조는 그 여세를 몰아 소격서(昭格署) 혁파를 요청하였다. 소격서란 전통 시대에 도교의 신선과 별자리에 제사 지내는 의식을 담당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 이름이다. 따라서 유교 교화를 실현시켜야 하는 조광조 입장에서 보면, 소격서는 허황한 것에 불과했다. 당시 관계한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히기는 했으나 소격서는 조광조가 바라던 바와 같이 마침내 혁파되었다.

38세에 대사헌에 오른 조광조는 정국공신(靖國功臣)의 개정을 요청한다. 정국공신이란 중종반정 때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을 가리킨다. 조광조는 정국공신을 봉할 당시에 작위를 너무 남발했다 하여 공신호를 박탈하고 토지와 노비를 환수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를 보통 위훈삭제(僞勳削除)라 한다. 그러나 이 위훈삭제 문제는 앞에서 성과를 올린 현량과 설치 및 소격서 격파와 차원이 달랐다. 다시 말해 위훈삭제는 당시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와 직접 연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이해 당사자들의 큰 반발에 부딪쳤다. 따라서 이해당사자인 남곤(南袞)ㆍ심정(沈貞)ㆍ홍경주(洪景舟) 등은 조광조 일파를 정치 일선에서 몰아내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동원했는데, 심지어 중종 임금까지 회유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중종 임금도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들이 왕권에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생각하기에 다다른다. 중종은 조광조가 처음 정치 일선에 나섰을 때 진정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뒤 상황은 급변하여 이제 남곤ㆍ심정의 편에 서서 조광조를 비판하였다.

그러다 1519년(중종14) 11월 15일에 이르러 마침내 거사를 결행한다. 중종은 조광조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11월 15일 밀교(密敎)를 내려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을 열고 여러 정승들을 들어오도록 하였다. 대궐의 다른 문과 달리 신무문의 열쇠는 사약방(司鑰房)에 있어서 임금이 승정원의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이로써 신무문을 통해 당시 높은 벼슬에 있던 정광필(鄭光弼)를 비롯해 남곤ㆍ홍경주 등이 모였다. 그리고 중종이 적은 밀지를 확인하였다. 중종은 언문으로 밀지를 적었는데, ‘주초위왕(走肖爲王)’의 사건만 보더라도 조광조가 역모를 꾀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주초위왕’이란 “조씨(趙氏) 성을 가진 사람이 왕이 된다”는 뜻으로, 홍경주 등이 조광조를 정치 일선에서 몰아내기 위해 꾸민 계략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남곤ㆍ홍경주 등은 중종에게 크게 동조하며 마침내 조광조 일파를 대거 숙청하는데 힘을 보탠다. 기묘사화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이로써 조광조는 처음 사형에 처할 뻔 했으나 영상 정광필이 눈물을 흘리며 극구 만류하니, 수정하여 결국 장(杖) 백 대를 맞고 능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때가 1519년 12월 초 무렵이었다.

조광조가 능주로 유배를 간 이후 조정은 기묘사화를 일으킨 주동자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로써 마침내 능주로 유배 간 조광조를 죽이자는 상소문을 임금께 올리는 상황에 이르렀고, 중종도 이에 동조하여 사약을 내려 죽도록 하였다. 이때 사약을 가지고 조광조에게 온 사람은 도사 유엄(柳渰)이었다. 조광조는 유엄에게 임금의 안부를 비롯해 “심정은 현재 어떤 벼슬자리에 있냐?”고 물었다. 또한 “내가 죽거든 관은 모두 마땅히 얇게 하고 두텁고 무겁게 하지 말라. 먼 길을 돌아가기 어려울까 염려된다.”라고 하였다. 이날은 12월 20일로 조광조가 죽자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려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3. 박상과 조광조의 분수원 만남, 그리고 이별

 

기묘사화가 일어날 당시 박상은 어머니 상(喪)을 막 벗어나는 무렵이었다. 일정한 관직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화를 다행히 면하기는 했으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동지의 입장에서 희생을 당한 사람들을 위해 신구(伸救)하려는 상소문을 작성한다. 이때 자제와 친척들이 “그러한들 화만 미칠 것입니다.”라고 하자 하늘을 쳐다보며 “결국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라고 탄식하며 상소문을 불에 태워버렸다. 그러던 중에 조광조가 능주로 유배 온다는 소식을 듣는다. 박상이 1515년(중종10) 「청복고비신씨소(請復故妃愼氏疏)」을 올린 것을 언로(言路)를 열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옹호했던 조광조. 이렇듯 두 사람은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때문에 박상은 조광조가 광주에서 가까운 능주로 유배 온다는 소식을 듣고서 관 숙소인 분수원을 찾아가 만난다. 아마도 박상은 8년 후배인 조광조에게 미안한 마음과 함께 위로의 말을 전했을 것이다. 소개한 시의 첫 구절에 “분수원 앞에서 일찍이 손을 맞잡았는데”라는 말을 통해 보면, 당시 박상과 조광조의 만남이 어떠했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그런데 며칠 뒤에 전해 온 조광조의 죽음 소식. 이 소식을 들은 박상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시 두 편을 지어 조광조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한 편은 이미 소개한 작품이고, 또 다른 한 작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무등산 앞에서 일찍이 손을 잡았는데 無等山前曾把手(무등산전증파수)
소 수레 타고 허둥지둥 고향으로 돌아간다     牛車草草故鄕歸(우거초초고향귀)
훗날 지하에서 서로 만나는 곳에서는 他年地下相逢處(타년지하상봉처)
인간세상의 시비 부질없이 말하지 마세나 莫說人間謾是非(막설인간만시비)
 

조광조는 1519년 12월 20일에 생을 마감한 뒤에 능주에 가매장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따뜻한 봄에 조광조의 동생 숭조(崇祖)가 관을 소 수레에 싣고서 경기도 용인까지 옮겨간다. 박상이 두 번째 구절에서 “소 수레 타고 허둥지둥 고향으로 돌아간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박상은 조광조가 죽음에 이른 것은 인간세상의 시비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오죽했으면 다음에 죽어 지하에서 만나거든 인간세상의 시비를 말하지 말자고 했을까. 가당치 않은 일로 죽음을 맞이한 젊은 조광조를 얼마나 안타깝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020년 12월. 이제 조광조가 세상을 뜬 지 501주년이 되었다. 500년이라는 시간은 짧지 않은 세월이다. 현대인의 입장에서 조광조의 수준 높은 개혁 정신을 기리며 그 뜻을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글쓴이 박명희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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