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의 성좌] 조국의 독립과 민주화에 바친 삶, 조아라(曺亞羅, 1912~2003)와 백청단(白靑團) 게시기간 : 2025-05-16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5-05-13 17:50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항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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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어머니’ 조아라 여사
혹독하고 암울했던 1980년대 광주, 두 분의 어른이 떠오른다. 홍남순 변호사(1912~2006)와 조아라 여사다. 1912년생 동갑인 두 어른이 계셨기에 광주는 빛났다. 노구를 이끌고 민주화운동에 앞장서신 그분들은 젊은이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언젠가 역사강의 중에 학생들에게 조아라가 누군지 아느냐고 물었다. 트로트가수 아니냐는 학생 한명을 빼고 아무도 모른단다. ‘민주화의 성지’ 광주에서 말이다. 남 탓이 아니라 내 탓이다. 지금부터라도 틈틈이 가르치겠다고 다짐했지만 이내 까먹었다.
![]() ‘광주의 어머니’ 또는 ‘민주화운동의 대모’라 불리는 조아라 여사, 그는 광주뿐 아니라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여류투사였다. 독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선하디 선한 눈매를 가지신 인자하고 넉넉한 할머니였지만 그 살벌했던 각종 시국집회에 빠지지 않고 나타나셨다. 하늘에 오르신 지 20여년이 훌쩍 넘었지만 양림동을 지날 때마다 문득문득 떠오른다. 필자는 1997년 여사를 광주 양림동에서 뵌 적이 있다. 서울에서 내려온 어느 교수님이 여사와 인터뷰할 때 묻어갔다. 영락없이 후덕한 ‘동네 할머니’였다. 필자의 선친과도 인연이 깊었기에 격하게 반겨주셨다. 그로부터 무려 26년이 지난 2023년에야 필자는 여사에 대한 논문 한 편을 쓸 수 있었다(「광주수피아여학교 백청단의 결성과 활동」, 『호남학』 73, 2023). ‘민주화운동가’가 아닌 ‘독립운동가’ 조아라 여사에 대해서다. 여사에 대한 글에서 단편적으로 언급되지만 학술적 연구는 없었기에 나름 정성을 쏟았다. 오늘은 그 이야기다. 잊혀져 가는 이름 ‘조아라’ 워낙 유명하신 분이니 인터넷에서 쉽게 검색될 것이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이런저런 포털을 뒤졌지만 영화배우, 연극배우, 탤런트, 바이올리니스트, 가수, 기상캐스더 등의 ‘조아라’만 뜨지 여사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당혹스럽다. 광주나 호남을 넘어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의 대모’라 불렸던 여사가 이렇게 잊혀지고 있다. 여사는 1912년 3월 28일 전라남도 나주군 반남면에서 조형률 장로와 김성은 집사의 3남 3년 중 차녀로 출생했다. 부친이 미국남장로회 선교부에서 근무했기에 일찍이 기독교를 신앙하고 어려서 광주로 이주했다. ‘아라(亞羅)’라는 고운 이름도 선교사가 지어줬다고 한다. 자연스레 미국남장로회에서 세운 수피아여학교 보통과에 입학하여 1927년 졸업하고 이어 고등과에 진학했다. 1919년 3월 10일 광주 3·1운동 때 많은 교사와 학생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다 옥살이를 한 그 학교다. 하지만 1929년 11월 발생한 광주학생운동 때 수피아여학교는 잠잠했다.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30년 1월 27일 정옥순 등이 항일시위를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무위에 그쳤다. 1919년 3월과는 사뭇 양상이 달랐다. 백청단의 결성 이때 4학년생이던 여사는 “조선인 학생들은 속속 검거되었지만 일본인 학생은 검거되지 않은 것에 극도로 분개(『매일신보』1933.02.03.)”하는 한편 “수피아여학교 학생들만 묵과하고 있음을 느낀 바(『조선일보』1933.02.03.)” 1930년 4월 양림동 수피아여학교 뒷산에서 항일비밀결사 백청단(白靑團)을 결성했다.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청년단(靑年團)”의 약칭이며, 결성회원은 7명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가장 고학년인 여사는 단장을 맡았다. 이 부분에 대해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공훈록』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광주 수피아여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을 경험하고 1930년 4월 중순경 동교생 6명과 함께 양림산에 모여 조선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 ‘백청단’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광주학생운동 때 일본인 학생과 달리 한국인 학생만 다수 검거되는 것을 보고 민족적 의식을 갖고 독립운동을 결심하였다. 이들은 은반지 30여 개를 만들어 뒤에 암호를 새겨 단원임을 표시하였으며, 회비와 의연금을 모아 문맹퇴치나 수재양성 사업 등 계몽운동과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졸업 후 취업이나 유학, 결혼 등으로 단원들이 흩어지게 되면서 1932년 7월 백청단을 해소하였다.
이후 전라남도경찰부와 광주경찰서 고등계에서 다른 ‘사상사건’을 수사하면서 백청단이 드러나, 광주 이일학교(李一學校)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33년 1월 9~10일 서복금·허귀례 등 동지 1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같은 달 31일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동지 6명과 함께 검찰로 송치되었다. 얼마 후 석방되었으나, 이 일로 교사직을 강제로 박탈당하였다. 이후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당한 수피아여학교의 재건에 힘썼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초기회원은 7명이었으나 후일 여사는 전체회원이 18명이었다고 회고했다. 자료에 따라 다른 부분이 많아 조심스럽지만, 필자가 파악한 단원은 다음과 같다.
출신지역이 파악된 경우는 모두 전남이며, 대부분 수피아여학교 보통과를 졸업했으나 나순덕과 최풍오는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다 1930년 1월 퇴학처분을 받고 수피아여학교에 편입했다. 이들과 함께 여사의 ‘운동권’ 삶이 시작되었다. 단원들은 은지환(銀指環), 즉 은반지를 끼고 다녔다고 한다.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그 관계자들은 은지환을 만들어 그 이면에는 번호를 새겨 나누어 가진 듯(『동아일보』1933.01.14.)”, “똑같은 모양으로 기호를 새긴 반지를 가지고 수년 전부터 비밀결사 조직(『매일신보』 1933.02.03.)”, “은지환 30여개를 만들어 이면에 암호를 새겨 단원이 한 개씩 나누어가져 단원임을 표시(『중앙일보』 1933.02.03.)” 등이라 나온다.
![]() 백청단사건 기사(『동아일보』 1933.02.02.) 필자는 이 부분이 이해되지 않는다. 누가 단원인지 식별하기 위한 것이라는데 비밀결사로서는 치명적인 실수다. 백청단이 정말 그같은 점조직이었는지도 의문이지만, 전교생이 200명 미만인 여학교에서 똑같은 은반지를 끼고 다니며 비밀이 유지되리라 생각했다는 점이 의아하다. “불온주의자 대검거 때 번호를 새긴 은지환을 발견(『경성일보』 1933.02.02.)”했다거나 “작년 11월 초순 주의자 등을 검거할 당시 번호가 기입되어 있는 지환을 발견하여 비밀결사체가 있는 것으로 추정(『조선일보』 1933.02.03.)”했다는 신문기사를 보더라도 그렇다. 그러면 백청단은 학생들의 누구의 지도도 받지 않고 순수하게 자발적으로 결성했던 것일까. 수피아여학교 교사 김필례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하기도 하지만 “평양 출신 김성찬(주: 김승찬) 선생님이라구 계셨는디 상해임시정부 얘기를 들려주시곤 혔지라. 그걸 듣고 남덜은 해외에서 독립운동까지 허는디 우리만 가만있을 수 있느냐 혀서 단체를 만든 것이제”란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평양 출신으로 광주YMCA에서 활동한 김승찬의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백청단의 활동 아무튼 이렇게 결성된 백청단의 활동은 무엇이었을까. 일제측 조사에 따르면 결성목적은 “조선의 독립”이었으니 그에 걸맞은 어떤 시도가 있었으리라 여겨지지만 확인이 쉽지 않다. 『수피아100년사』에 나오는 다음의 내용은 검증이 필요하다. ▸ 활동으로는 기금을 모으는 데 힘씀
▸ 단원들은 항상 태극기를 몸에 지니고 다니다가 장소나 시간에 관계없이 동네 여인들이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글을 가르치고 태극기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다녔다고 함 ▸ 단원들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과 직접 편지를 주고받으며 수피아에도 백청단이 있음을 알림
![]() 수피아여자고등학교 조아라 기념비 항상 태극기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든가, 상해임시정부의 김구와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등의 내용은 과장일 가능성이 크다. 차라리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는 문맹퇴치가 급선무라 하여 일요일이나 축제일, 방학 때 고향에서 농민계몽운동에 열중(『중앙일보』 1933.02.03.)”했다는 내용이 현실성이 있다. 앞서 표에도 나오듯이 단원 중 몇 명이 1932년 브나로드운동, 즉 농촌계몽운동에 참여했으며 농촌계몽운동에서 학생의 역할이 문맹퇴치였기 때문이다. 백청단의 해소와 ‘백청단사건’ 백청단은 1932년 7월에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단원들이 졸업 후 취직하거나 결혼했기 때문이다. 이는 새로운 단원들이 제대로 충원되지 못했음을 짐작케 한다. 졸업생의 상당수가 귀향했으니 선후배간 연결도 매끄럽지 못했을 것이다. 핵심인물인 조아라가 1931년 3월, 그리고 그 다음으로 고학년인 강인숙이 1932년 3월 졸업하면서 백청단은 구심점을 잃었다. 이렇게 백청단은 발각되지 않고 비밀결사로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광주학생운동 3주년을 맞은 1932년 11월 3일 경찰읜 광주 및 인근의 6개 군에서 ‘청년남녀’ 70여명을 검거하고 일부를 검찰에 송치했다. 이른바 ‘전남노동재건사건’이었다. 이들 중에는 수피아여학교 출신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전남노동재건사건’은 백청단과 무관했다. 하지만 경찰은 ‘청년남녀’ 중 백청단 관계자를 발견하고 조사의 목표를 백청단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1933년 1월 이일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조사아를 시작으로 단원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동경에 유학 중인 강인숙을 지명수배했으며, 수피아여학교 교감 김명신과 교원 김승찬의 가택도 수색했다. 그리고 조아라 등 7명을 검찰에 송치했다. 언론에서는 “조선에서 처음되는 녀성들의 비밀결사 백청단사건(『동아일보』 1933.02.02.)”이라며 연일 대서특필했다. 이들에게는 ‘치안유지법위반’의 혐의가 적용되었지만 결국 모두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하지만 여사는 직장인 이일학교에서 사직했다. 후일 “석방과 함께 교직을 박탈당하고 요시찰 인물로 낙인 찍히게 된 것”이라 회고했는데, 이것이 학교측의 ‘강제’였는지 ‘권고’였는지는 판단이 서지 않는다. 당시 이일학교 교장은 미국남장로회 선교사 쉐핑(E. J. Shepping: 서서평)이었는데, 비록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으나 백청단 결성을 주도한 조아라에게 계속 교사를 맡기기는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이후 여사는 1936년과 1939년에도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백청단’이라는 또다른 ‘항일의 성좌’ 앞서 표에서 나오듯이 백청단원 중 조아라와 나순덕만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다른 단원들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을 만한 요건을 갖추었는지 조사가 필요하지만 시도의 가치는 충분하다. 설령 인정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꿈많고 꽃다운 학창시절 조국의 독립을 위해 미력이나마 다하려 했던 그들은 ‘백청단’이라는 또다른 ‘항일의 성좌’임이 분명하다. 그 중심에 섰던 조아라는 이후 가정적인 불행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며 198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의 대모’라 불리는 ‘거성(巨星)’으로 밝게 빛났다. 단 한 번 뵈었을 뿐인데 아직도 그 인자하고 겸손하며 소탈한 모습이 아른거린다. 그리고 ‘조아라’ 이름 석자가 점차 잊혀지는 게 속상하다. 다음 학기 수업에는 양림동 조아라기념관 방문소감을 과제로 낼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든다.
글쓴이 한규무 광주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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