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이야기] 배를 타고 가다 만난 환상의 세계 게시기간 : 2021-03-24 07:00부터 2021-12-21 21:21까지 등록일 : 2021-03-22 11:13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옛 그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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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어부가 배를 타고 도원 입구에 다다랐다. 우뚝 솟은 바위동굴 입구 안쪽으로 분홍빛의 복숭아꽃이 마치 어부의 길을 인도하기라도 하듯 이어진다. 환상의 근원이 그쪽임을, 눈앞에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임을 기대하게 한다. 동진(東晋)의 작가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도화원기(桃花源記)」도 그렇게 시작한다. 진(晉)나라 태원 때, 무릉에 어부가 살았다. 그는 물길에서 길을 잃었는데 얼마나 갔는지 모르다가 홀연히 복숭아꽃 가득한 숲을 만났다. 수백 걸음 되는 거리를 노를 저어 가보았더니 온통 복숭아나무뿐 다른 나무가 없었고, 향기로운 꽃이 아리따웠으며 떨어지는 복숭아꽃잎은 어지럽게 흩날렸다. 어부가 이를 신기하게 생각하여 복숭아 숲이 끝나는 곳까지 가보고 싶어졌다. 숲이 다 끝난 곳은 물길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이어 작은 산이 나타났는데, 이 산에는 작은 동굴이 있었고 그 안에서는 빛이 아른거렸다. (후략)
晉太元中,武陵人,捕魚為業,緣溪行,忘路之遠近 忽逢桃花林,夾岸數百步,中無雜樹,芳草鮮美,落英繽紛 漁人甚異之. 復前行,欲窮其林. 林盡水源,便得一山. 山有小口,彷彿若有光. (후략) 도연명의 「도화원기」를 읽고 많은 사람들은 이 도원을 실제 장소로 생각하고 찾으려 했다. 그러나 아무도 어부가 방문했던 도원은 찾아내지 못했다. 도원은 이 세상에 없는 곳이지만 어느덧 이상향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이름난 문인들은 도원을 그리워하며 시문으로 남겼고, 뛰어난 화가들은 그림으로서 도원을 존재하게 했다. 영원한 꿈으로 남은 상상 속의 장소, 조선 초기 안평대군도 꿈에서 도원을 찾아가 노닐며 안견(安堅)으로 하여금 꿈속의 도원을 그림으로 남기지 않았던가.
허백련과 연진회(鍊眞會) 이 그림을 그린 허백련(許百鍊, 1891-1977)은 본관은 양천이며 호는 의재(毅齋)이다. 허백련은 전통회화 최후의 거장으로 불리는 근현대 대표적인 한국화가이다. 한국화단에서 단아하고 깊이 있는 운필을 통하여 남화의 정신세계를 가장 진솔하게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시서화를 겸한 남종화가로서 호남서화계의 상징적인 거봉(巨峰)으로 추앙된다. 허백련은 어려서 운림산방에 드나들며 소치 허련(小癡 許鍊, 1809-1892)의 아들인 미산 허형(米山 許瑩, 1862-1938)에게 그림공부를 하였다. 허형에게 그림을 배우며 소치 허련과 추사 김정희를 흠모하였고 그들이 추구한 남종화의 세계에 깊이 심취하였다. 한말 진도에 유배왔던 무정 정만조(茂亭 鄭萬朝, 1858-1936)로부터 한학과 시문장을 익혔다. 1912년 일본에 건너가 리츠메이칸[立命館] 대학과 메이지[明治] 대학 법과에 다녔으나 곧 중퇴하고 일본 남종화의 대가인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에게서 남종화의 정신과 조선남종화 고유의 개성과 특징을 살릴 수 있도록 정진하라는 것을 배웠다. 귀국한 후 일본화풍에 경도되기보다는 전통화풍을 유지하면서 전시회를 열거나 여러 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며 화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였다. 1922년 조선총독부가 일본의 문부성전람회 제도를 본떠 만든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추경산수>로 1등 없는 2등상을 수상하면서 화명(畵名)을 쌓았다. 광주 전통화단이 형성된 것은 허백련이 광주에 정착한 후 1938년 서화가들의 모임인 연진회(鍊眞會)를 창설한 때부터이다. 허백련은 남종화의 부흥만이 전통 회화의 현대적 계승이라 믿었으며 화가로서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라 생각하였다. “예술을 배운다는 것은 반드시 그 참된 경지에 이르는데 있으며, 養生이라는 것은 반드시 그 참된 근원을 보전함에 있지 아니한가! 우리 會가 藝樂을 바탕으로 서로 모여서 삶을 값지게 보내기 위해 鍊眞이라 이름 지으니 그 누가 거짓이라 하겠는가. (중략) 하물며 시·서·화 이 세 가지는 고금을 통하여 누구나 다 좋아하는 것이요, 또 마음이 맑고 깨끗해서 언제나 정직하고 겸손하며 자기 취향에는 예술을 사랑하는 뜻을 한데 모으기 위하여 일주일에 한 번씩 모임을 갖고 서로 강론하고 토의하며 또한 익히고 닦으며 한가로운 담소로써 그 정을 나누고 또한 양생에도 어긋남이 없이 도움이 된다면 참으로 三家三絶의 도를 닦았다 이를 것이다.”
學藝者必格其眞境, 養生者必保其眞元. 吾之會以遊於藝樂餘生爲 則故命名以鍊眞, 其孰謂之僭乎哉. (중략) 此詩書畵三物古今人之所嗜好者多矣而沖澹瀟之趣向別乎他藝得其眞則人皆愛玩而神之不亦貴乎所以不費必於浪地一週日間一會爲例相與討講加而習熟慫容談笑以暢其情庶幾不愆於養生而意成三家三絶云爾. 허백련과 연진회를 통한 남종화의 부흥운동은 화단의 한 세력을 형성하였고, 지방화단으로서 문기(文氣)와 사의성(寫意性)을 중시하는 광주화단의 특성이 확고하게 구축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른 지역에 비해 광주화단이 전통성이 강하게 두드러지는 이유는 현재까지도 지속되어 온 이러한 성향 때문이라 생각한다. ‘전통적 남종화의 부흥’을 통한 회화의 현대적 전승이라는 목적아래 연진회를 중심으로 광주의 서화가들을 비롯해 허백련에게 그림을 배우려는 이들이 모여들었고, 1939년 금동에 연진회관을 마련하면서 매년 회원전을 열었다. <무릉도원>은 1939년, 연진회의 첫 번째 회원전이 개최되던 해에 그려졌다. 허백련의 ‘의재산인(毅齋散人)’시기에 해당한다. 요컨대 허백련의 화풍은 대체로 그가 사용하고 있는 호에 따라 시기별로 구분이 된다. 그림을 시작하면서부터 ‘의재’라는 호를 40대 중반까지 썼다. 중기는 ‘의재산인’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연진회를 창립한 1938년부터 1950년경, 40대 중반에서 50대 말까지이다. 후기는 60세 회갑을 맞이하면서 ‘의도인(毅道人)’, ‘의옹(毅翁)’이라는 호를 1950년대 이후 사용하였다. 허백련은 초기에 남종화의 다양한 화풍을 익히고 시도하면서 자신의 회화세계를 형성해갔다. 대체로 일본 유학시절 중국의 대가나 화보를 방하며 수련한 형식주의적인 경향이지만 곧 자신만의 남종화법으로 그렸다. 의재산인 시기에는 이러한 역대 여러 명가의 화법을 두루 응용한, 다양한 시도를 종합한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하게 된다. 지금부터 살펴볼 허백련의 <무릉도원>은 의재산인 시기의 그의 독자적인 화풍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남종화풍으로 그려낸 이상화된 ‘도원경’이지만 남도지방 산야의 친근한 이미지를 그림 속에 녹아낸 산수화이다. 남종화의 필법으로 풀어낸 도원경 <무릉도원>은 화면 오른쪽 거대하게 우뚝 솟은 바위 동굴 어귀 나룻배를 탄 어부의 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그림 1). 옆으로 긴 화면으로, 작품은 크지 않지만 그 앞에 서면 마치 무릉도원으로 배를 저어가는 어부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입구부터 연분홍빛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동굴을 지나 물길을 타고 왼쪽으로 꺾어 들어서면 평지에 다다르고 몇 채의 가옥이 복숭아 꽃나무에 둘러 싸여 있다. 이어지는 물길을 따라 복숭아 꽃나무도 이어지며 주산(主山) 너머 멀리 마을까지 연결된다.
근경 입구의 거대한 바위와 언덕은 성근 피마준(披麻皴) 피마준*과 부벽준**, 태점(苔點)***으로 묘사하였다. 수종(樹種)이 다른 잡목을 적절하게 배치해 푸른색, 갈색, 연두색을 섞어 담채하여 표현하였다. 전체적으로 먹을 중첩시키며 꼼꼼하게 경물들을 묘사하고 있다. 나룻배를 탄 어부는 전형적인 화보풍으로 간략하게 그려 넣었다. 화면 중앙에서 살짝 치우쳐 있는 주산은 왼쪽으로 조금 휘어진 듯한 모습인데 이는 허백련 특유의 표현방식으로 그의 여러 작품에서 발견된다. 동굴 입구를 제외하면, 나지막하고 둥글고 아담한 산과 유유히 흐르는 강의 평온한 풍경은 우리나라 산야의 실경을 그린 듯하다. 도원은 세상과 단절된 탈속(脫俗)의 이상경일 터이지만 허백련은 안온하면서도 침착한 붓질과 섬세한 설채(設彩)를 통해 고즈넉한 느낌으로 우리네 풍경과 가깝게 묘사하고 있다. * 피마준은 바위나 산 등을 표현할 때 위에서 아래로 길게 긋는 방식으로, 마치 베의 올을 풀어 놓은 듯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 부벽준은 산수화 준법의 하나로, 도끼로 나무를 찍었을 때 생긴 면처럼 수직의 단층이 부서진 나무의 결이나 바위의 입체감을 표현하는 기법이다. *** 태점은 산수화에서 바위나 산, 나무줄기, 이끼나 잡초 등을 표현할 때 찍는 작은 점을 말하며 농담이나 크기로 변화를 주기도 한다.
그림 2 허백련, <석문도명>, 1939년, 비단에 엷은 색, 67.0×39.3cm, 의재미술관소장 이러한 도원경을 허백련은 한 점 더 남기고 있는데 <석문도명(石門桃明)>이라는 제목의 그림이다(그림 2). 현실의 세계와 도원을 구획하는 역할을 하는 웅장하게 솟은 석문을 거쳐 도원으로 향하는 나룻배를 탄 어부의 모습과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복숭아꽃 너머 저 멀리 짙은 푸른빛으로 빛나는 우뚝 선 먼 산이 화면 전반에서 활기찬 분위기를 보여준다. <석문도명>은 <무릉도원>과는 달리 화면구성을 세로로 하였다. 화면 전체에 연두색, 푸른색, 분홍색 등의 설채는 앞서 <무릉도원>보다 더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느낌을 갖게 한다. 이 작품에서 허백련은 도원의 전체적인 전경을 보여주기보다 도원에 이른 길목의 풍경과 석문 너머 복숭아꽃 사이로 저 멀리 보이는 산사(山寺)와 마을을 지붕만 살짝 드러내 신비감을 더하고 있다. 석문 너머 물길은 지그재그로 중경에서 원경까지 이어지며 깊이 있는 공간감을 만들었다. 역시 한쪽 끝이 휘어 있는 주산은 중첩되어 산세를 이루고, 푸른색, 분홍색의 채색만으로 장식적인 요소를 더해주었다. 의재산인 시기 독자적인 화풍을 정립시켜 나간 허백련은 <무릉도원>과 <석문도명> 두 작품에서 이상경을 실제 주변의 소박한 자연 풍경과 접목시켜 남종화풍을 토대로 자신감 있는 구성과 표현방법을 보여준다. 허백련에게서 영향을 받은 화가들은 소재의 선택뿐만 아니라 화면의 구도나 필법, 필치에서 허백련이 강조한 ‘전통성’에 부응하였다. 허백련과 연진회를 통한 남종화의 부흥운동은 화단의 한 세력을 형성하였고, 지방화단으로서 문기와 사의성을 중시하는 광주화단의 특성이 구축되었다. 해방 이후 연진회는 기존 회원들과 그림을 배우고자 새로이 문하에 들어간 신진작가들에 의해 광주화단의 성격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지방화단의 보수적인 집단화라는 부정적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전통회화의 맥을 이어오면서 다양한 조형세계를 펼쳐 보였던 몇몇 화가들의 활동은 광주 전통화단이 다른 지역 미술계와 차별되며 지금까지 유지되어온 바탕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그림 2-1 석문으로 들어서는 어부
그림 2-2 푸른빛의 주산과 도원 ‘와유(臥遊)’의 즐거움 도연명의 「도화원기」는 몽환적인 이야기로 결코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가상의 공간을 읊었고, 허백련의 <무릉도원> 은 현실에는 없는 이상경의 공간을 담아내었다. 옛 사람들은 산수를 즐기는 방법으로 자연 속으로 직접 산과 들로 다니기도 하고 글과 그림을 통해 방안에 누워서 그림 속에 펼쳐진 맑고 시원한 자연 속의 경치를 감상하기도 했다. 직접 다니지 않고도 그림을 감상하면서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는 그림 속으로의 여행은 색다른 즐거움일 것이다. 존재하지는 않지만, 또는 가보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도원’이라는 이상경을 그의 그림을 통해 상상한다. 또 그 속에서 유유히 거닐며 복숭아 꽃잎이 떠 흐르는 물길을 찾아 상상의 나래를 펼쳐볼 수 있다. 허백련의 두 작품으로 복숭아꽃 피는 이 계절, ‘와유’로서 봄을 만끽하면 어떨까. 참고문헌 및 인용출처 도연명, 「도화원기」의 전문과 번역은 고연희, 『그림, 문학에 취하다』(아트북스, 2011), pp. 154-156.
의재 허백련의 그림은 국립광주박물관, 『전통회화 최후의 거장, 의재 허백련』(국립광주박물관, 2015), 도 34, 도 35 참고. 김소영, 「근대기 광주 전통화단의 형성과 전개」, 『호남문화연구』67(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원, 2020), pp. 187-224. 글쓴이 김소영 전남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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