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실용의 도구로서의 간찰, 다산의 생각 게시기간 : 2020-11-26 07:00부터 2020-12-25 11:32까지 등록일 : 2020-11-25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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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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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시대의 좋은 글씨> 다산은 간찰을 쓰는 글씨체의 전범(典範)으로 오준(吳竣, 1587~1666)과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글씨를 언급하였다. 근래에 윤순(尹淳)의 글씨를 모범으로 배워서 서법이 어지럽고 천박해졌다고 하면서 오준의 글씨를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지금 전하는 오준(吳竣)의 간독 글씨들은 모두가 정밀하고 법도가 있어서 후생에게 모범이 될 만하다. 근세에는 모두 윤순의 간독을 익히고 있지만, 윤순의 글씨는 너무 다듬어서 함축성이 적다. 근세 40년 동안에 걸쳐 서법이 어지럽고 천박해진 것은 모두 이 때문이다. 이를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는가 하면, 죽남(竹南, 오준의 호)의 글씨만이 바로 그 병통을 잡을 수 있는 화타와 편작인 것이다. 그러나 기예로 말한다면 윤순이 더 낫다.(『與猶堂全書』권14 跋竹南簡牘)
이전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간찰 글씨체에 대해서 언급한 것을 살펴본 바가 있다. 족손(族孫)인 박남수(朴南壽, 1758~1787)가 당시 시중에 유행하던 윤상서체(尹尙書體)의 편지 글씨를 쓰는 것을 보고서, 그 글씨가 비록 벼슬하는 사대부들의 모범이 되기는 하지만 대가의 필법은 아니라고 주의를 주었다. 글씨가 우아하기는 하지만 풍골(風骨)이 전혀 없어서 대가의 필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윤순은 연암 박지원이 비판한 윤상서체의 당사자인 윤급의 동생이다. 윤순의 글씨가 윤유의 글씨와는 물론 다르지만 크게 윤상서체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하겠다. 다만 다산은 윤순 글씨의 예술성은 인정하였다. 간독 글씨에서는 윤순의 글씨를 배우지 말라고 하면서도 예술성의 면에서는 윤순의 글씨를 인정하는 모순적인 태도이다. 오준의 글씨는 조선 전기의 사대부의 글씨를 지배했던 송설체(松雪體)의 완성으로 보여진다. 한석봉이나 오준 등 명가들의 글씨를 극복하고 나온 윤순의 글씨를 부정하는 것은 좀 의아하다. 다산이 백하 윤순의 글씨를 비판한 것은 다산이 하늘처럼 생각하는 정조의 서예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정조는 우리나라 서예가들이 안평대군과 한석봉을 명필로 생각하여 그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는데, 윤순 이후에 서풍이 크게 변하여 솔진한 기운이 없어지고 메마르고 껄끄러운 글씨를 쓰는 병이 생겼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먼저 촉체(蜀體)를 배우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명필로는 안평대군을 제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안평대군은 여우꼬리털 붓[狼尾筆]으로 백추지(白硾紙)에 글씨를 썼는데, 오직 한호(韓濩)만이 그 묘리를 깨달았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서예가들이 모두 비해당(匪懈堂)과 석봉(石峯)의 문호를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고 판서 윤순이 나오자 온 나라 사람들이 쏠리듯 그 뒤를 따랐으니, 이에 서도가 한번 크게 변하여 진솔한 기운이 없어지고 점차 마르고 껄끄러운 병통이 열리게 되었다. 이제 서풍(書風)을 순박한 쪽으로 돌려놓고자 하는 바이니, 그대들부터 먼저 촉체를 익혀야 할 것이다.(『弘齋全書』 권163 日得錄3)
윤순을 비판하고 오준의 간찰 글씨를 배울 것을 강조한 다산이었지만, 다른 글에서는 이광사의 글씨를 높이 평가하였다. 이광사는 윤순의 제자이다.
이 「야취첩」 1책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이다. 근세의 서가로서는 오직 이광사만이 독보적인 존재인데, 참판 조윤형과 표암 강세황은 그를 여지없이 심하게 비방하였다. 그것은 대체로 자기 역량을 헤아리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그러나 비방을 부를 만한 이유는 있다. 그의 잔글씨 해서와 행초(行草)는 서법에 맞아 정밀하고 기묘하여, 그 중에 아주 좋은 것은 왕희지(王羲之), 왕헌지(王獻之)의 경지이고, 조금 낮은 것도 장지(張芝), 장욱(張旭)의 경지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대자(大字)인 반행서(半行書)는 도무지 법도가 없어서 그 글자 모양만 보기 싫을 뿐 아니라, 그 획법도 무디고 막혀서 신묘함이 없다. 이런 것을 가지고도 본받을 만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현혹된 것이다. 이 「야취첩」도 잔글씨 해서와 작은 글씨 초서가 뛰어날 뿐이다.(『與猶堂全書』권14 跋夜醉帖)
다산은 간찰 글씨체의 전범으로 죽남 오준을 내세웠으면서 원교 이광사의 「야취첩」을 보고는 잔글씨 해서나 행초에 대해서는 또 원교의 글씨가 좋다고 하였다. 다산은 원교의 큰글씨 반행서의 ‘미친 듯이 엎어진[顚狂敧倒]’ 글씨를 매우 싫어하였다. 획법도 ‘무디고 막혀서 신묘함이 없다[鈍滯無神]’고 평하였다. 보수적 생각으로는 원교의 큰 글씨에 보이는 이러한 광적인 글씨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일정한 제한이 있었다. 조선의 서가들은 왕희지를 본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황기로(黃耆老)의 ‘은일(隱逸)’ 지향적 서풍, 양사언(楊士彦)의 도가적인 ‘유선(遊仙)’ 지향에 담긴 서풍, 이광사의 ‘미친 듯이 엎어진’ 서풍의 흐름도 하나의 예술적 취향을 가진 서가들의 글씨이다. 이러한 예술가적 광기를 가진 서풍을 다산은 싫어하였다. 남아있는 다산의 글씨에서 광초(狂草)는 찾아볼 수 없다. 또 큰 글씨도 그다지 남아있지 않다. 가장 큰 글씨가 아마 「하피첩(霞帔帖)」의 글씨일 것이다. 말하자면 다산은 간찰 글씨를 실용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었지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성정(性情)을 투영하는 예술 작품을 만든다는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실용문으로서의 간찰> 다산은 유배된 이후 자신의 일족이 이제는 폐족(廢族)이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자식들에게 폐족이 살아남으려면 간찰 정도는 쓸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다산은 서간문을 선비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교양이라고 생각하고 독서를 하고 문장과 글씨를 익혀서 간찰 정도는 제대로 쓸 수 있도록 공부하라고 다그쳤다.
둘째의 필법이 조금 나아지고 문리(文理) 또한 진보가 있으니 나이를 먹은 덕이냐 아니면 때때로 익혀서 그런 것이냐. 절대로 자포자기하지 말고 성의를 다하고 부지런히 힘써서, 책을 읽고, 책을 초록하고, 글을 짓는 일에 혹시라도 허투루 지내서는 안될 것이다. 폐족으로서 글도 모르고 예법도 모른다면 어찌하겠느냐. 모름지기 보통 사람들보다는 백배의 공력을 더하여야 겨우 사람 축에 들게 될 것이다.(『與猶堂全書』권21 書 答二兒 壬戌二月七日)
실용문으로서의 간찰에 대해서 다산은 극도의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간찰에 쓰는 한마디 말도 허투로 해서는 안된다고 경계하였다. 자신의 당호인 ‘여유당(與猶堂)’ 기(記)에서도 반복되는 말이지만, 강진에 유배 중이던 1810년(순조10) 2월에 다산 동암(東庵)에서 둘째 아둘 학유에게 교훈을 써주었다.(『文集』18 家誡 贐學游家誡) ‘남이 알지 못하게 하려면 하지 않는 것이 낫고 남이 듣지 못하게 하려면 말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하는 경계의 말을 강조하고 있다. 하늘을 우러러 땅을 굽어 하나의 부끄러움이 없는 행동을 강조한 것이겠지만, 실제로는 공서(攻西)의 회오리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생각된다. 많은 역모 사건의 물증이 간찰에서 비롯되었다. 간찰 때문에 패가망신하는 선례를 많이 보아왔던 것이다. 다산보다 약간 윗세대인 복암(茯菴) 이기양(李基讓, 1744~1802)이 자신의 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보낸 언간을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802)이 외부로 공개하였다고 하여 스승격인 순암을 격렬하게 비판한다. 순암의 손녀가 복암의 동생 이기성에게 시집갔으니 순암은 복암의 스승이자 사돈 어른이며 친구의 아버지이다. 복암이 스승인 순암을 찾아가 절교하듯 격렬하게 항의한 이 사건은 신서(信西)와 공서(攻西)를 막론하고 근기 지식인 사이에는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다. 이기양이 그토록 격렬하게 순암에게 항의하였던 것은 간찰이 가문을 망치는 화근이 될 수가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바로 다산이 어렸을 때 지근거리에서 들었던 이야기일 것이다.
남이 알지 못하도록 하고 싶으면 행위를 하지 않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남이 듣지 못하도록 하고 싶으면 말을 하지 않는 것 만한 것이 없다. 이 두 구절의 말을 평생 동안 몸에 지니고 왼다면 위로는 하늘을 섬길 수 있고 아래로는 집안을 보존할 수 있다. (중략) 편지 한 장을 쓸 때마다 모름지기 두 번 세 번 읽어보면서 기원하기를, “이 편지가 길가에 떨어져 있어 원수진 사람이 보더라도 나에게 죄가 없을 것인가?” 라고 하고, 또 “이 편지가 수백 년 뒤까지 유전되어 많은 견식이 있는 사람들이 보아도 나에게 비난이 없을 것인가?” 라고 한 뒤에 봉함해야 하니, 이것이 군자가 근신하는 태도이다. 나는 젊은 시절에 글씨를 빨리 썼으므로 이 계율을 많이 범하였다. 중년에는 화난이 두려워 점차로 이 법도를 지켰더니, 매우 유익하였다. 너희들은 이 점에 명심하라.(『與猶堂全書』권18 家誡)
심지어 다산은 열흘에 한 번씩은 편지를 점검하여 번잡스럽거나 남의 눈에 걸릴 만한 것이 있으면 모두 가려내어 심한 것은 불에 태우고 덜한 것은 노를 꼬고 그 다음 것은 찢어진 벽을 바르거나 책가위를 만들어 정리하라고 당부하였다. 열흘에 한번씩 간찰을 정리하라는 다산의 훈계에서 우리는 다산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가 어떠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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