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시초대석] 작법으로 읽는 한시 절구(2) 따로 있다[別有] 게시기간 : 2020-01-02 07:00부터 2020-01-30 14:03까지 등록일 : 2019-12-30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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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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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유(別有)’는 ‘그것 말고도 더한 ~가 있다.’, ‘특별히 ~가 있다.’는 의미이다. 한시 절구의 3구나 4구에 자리하여, 앞의 구절에서 제시한 것과는 다른 특별한 것을 강조할 때 주로 쓰는 표현이다. 앞에서 제시한 이러이러한 것들도 있지만 이제부터 제시하는 것이 그보다 낫다는 반전의 의미가 은연중에 담겨 있다. 독자들도 그런 점을 의식하면서 읽어야 시의 맛을 더 깊이 느낄 수 있다. 얼핏 보면 ‘별유(別有)’라는 시어 때문에,
라는 이백(李白)의 「산중문답(山中問答)」 시가 이런 용례를 쓴 것 같지만, 그보다는 그와 동시대의 시인인 하지장(賀知章)의 「채련곡(采蓮曲)」이라는 시가 이 용법에 더 가깝다.
봄꽃도 좋겠지만, 그것 말고도 마름 풀, 연꽃 같은 볼거리가 있으니 봄이 다 갔다고 아쉬워할 게 없다는 의미가 ‘별유(別有)’라는 시어 하나로 적절하게 강조가 되고 있다. 하늘에서 유배 온 신선이라는 뜻의 ‘적선(謫仙)’이라는 유명한 호칭을 이백에게 안겨 준 이가 바로 하지장이다. 그 역시 당대에 시로 명성이 자자하였다. 홍류동 시의 작자는 조선 말기의 시인인 황현(黃玹, 1855~1910)이다. 그의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이며,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일찍부터 시문으로 명성이 있어서 과거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이 지은 매천의 「본전(本傳)」에 그의 과거 급제와 관련한 일화가 전한다.
“고종(高宗) 태황제(太皇帝) 20년에 특별히 보거급제시(保擧及第試)를 실시하였다. 황현이 초시(初試) 초장(初塲)의 책제(策題)에 대책(對策)을 내니, 시관(試官) 한장석(韓章錫)이 그 문장을 보고 크게 놀라 1등으로 뽑았다가 얼마 뒤 시골 사람인 것을 알고는 2등으로 고쳤다. 전정(殿庭)에서 보는 회시(會試)에서는 파방(罷榜) 되었다.”
이후 이처럼 부패한 세태에 환멸을 느끼고 과거를 포기한 채 고향에서 은거하였다. 34세 때인 1888년에 부모의 권유에 못 이겨 성균관 생원시(成均館生員試)에 응시하였는데, 장원급제하였다. 1910년 일본에 국권을 강탈당하자 망국의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였다. 그가 자결하며 남긴 절명시(絶命詩)는 지식인으로서의 고뇌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가 남긴 저술로는 『매천집』, 『매천야록(梅泉野錄)』 등이 있다.
시의 배경이 되는 홍류동(紅流洞)은 가야산(伽倻山) 해인사가 있는 계곡 일대를 가리킨다. 이곳에는 당(唐)나라에서 「황소에게 보내는 격문[檄黃巢書]」 등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유적이 도처에 전해지고 있다. 농산정(籠山亭)과 제시석(題詩石) 등이 그것이다.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고운의 시를 직접 써서 절벽에 새기기도 할 정도로 고운과는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역이다. 매천은 35세이던 1889년에 이곳 일대를 유람하였다.
홍류동 계곡은 이처럼 고운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데다 워낙 절경인지라, 예로부터 많은 사람이 찾아들었다. 그중에는 자신의 이름을 암벽에 새겨 천년만년 전하려는 이들도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가뜩이나 당시 지식인들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매천은 곳곳에 새겨진 이름을 보고 이내 그렇게 이름이나 새기는 일은 하등 선비[下士]나 할 짓이라고 질타를 하였다. 『안씨가훈(顔氏家訓)』 「명실(名實)」에 “상등의 선비는 이름 내기를 생각지 않고, 중등의 선비는 이름 내려고 애를 쓰며, 하등의 선비는 이름을 훔친다.[上士忘名 中士主名 下士竊名]”라는 내용이 있다. 매천은 이 말을 염두에 두고, 이름이 날 만한 실상이 없으면서 이름을 내려고 하는 것은 이 하등의 선비가 명성을 훔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기롱한 것이다.
매천은 나라를 뺏긴 울분을 토하며 자살했던 애국지사로만 부각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과거에서 장원을 차지하고 시로 일가를 이루었던 문사(文士)였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역사적으로 절의를 세웠던 위인이나 의병장 등에게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던 강개지사(慷慨之士)이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늘 지식인의 역할을 고민하고, 이 시에서 보이는 것처럼 당시 지배층 사족(士族)들의 행태에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주었던 참된 지식인이었다.
매천이 조부의 산소에 작은 비석을 세운 뒤 감회를 읊었던 시의 뒷부분에서도 이런 그의 사상을 여실히 살필 수 있다.
사람이든 상품이든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지 못하면 정당한 대접을 받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자연히 아름답게 포장하고 홍보하는 일에 힘을 쏟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그만한 내실을 갖추었을 때의 일이다. ‘당신이 보는 것 말고도 다른 특별함이 있다.[別有]’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면서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억울해 하거나, 지나치게 꾸미는 것은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행위일 뿐이다. 매천의 시 세 편에 담긴 일관된 메시지가 더욱 크게 다가오는 시점이다.
글쓴이 권경열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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